스팀슨관(Stimson Hall)과 본관(本館, Underwood Hall), 신학(神學館, Appenzeller Hall)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스팀슨관은 1920년 완성되었으며, 건평 131.75평, 연건
평 414.56평의 석조 2층 건물로서 연세 캠퍼스에 최초로 세워졌다.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의 스팀슨씨(Charles M.Stimson)의 기부금으로 지은 것
으로, 대학본부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대학원과 대외협력처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1981년 9월 25일 문화재 사적 275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본관은 1924년에 본대학교의 전신 연희
전문학교의 창설자이며 초대 교장이었던 원두우(元杜尤) 박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의 형제인 죤 언더우드씨의 기부금으로 지은 것이다.
건평 209.74평, 연건평 876.38평인 이 4층의 석조 건물은 문과대학 전용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지은 대학 본부 건물로 총장실, 기획실, 교무처, 총무처 및 재무처에서 사용하고 있
으며 문화재 사적 276호로 지정되어 있다. 미국 매사츄세츠 피츠월드의 제일감리교회에 의한 기부금으로 1924년에 준공된 신학관은 현재 신과대학 전용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건평 131.34평, 연건평 471.59평의 석조 3층 건물로 문화재 사적 277호로 지정되어있다.
1955년 11월 개관한 논지당은 여학생 상호간의 친목도모와 휴식을 위해 마련한 여학생관이다. 학생회관보다 먼저 지어진 여학생관의 논지당이 라는 이름은
당시 백남준 총장이 붙인 것인데, 앞뜰에 있는 두 그루의 거목의 이름을 따 The Syxamore Hall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 뒤 매년 여학생의 수가 늘어나자
1963년 9월 중축하여 기예실습실과 휴게실을 두었다. 현재도 여학생 휴게실로 사용되고 있다.
연희관은 1956년 10월에 미 제5공군과 본 대학교에 의해서 지어진 건평 423.80평, 연건평 2,014.65평의 방대한 건물로 현재 사회과학대학과 행정대학원이 사용하고 있다. 특히 이 연희관은 이 건물을 세우는데 도와준 미국의 원조, 협력 정신을 체득하여 세계평화와 자유 정의의 실현을 위하고 과학 교육으로 문화 창조, 진리의 거화(巨火)를 밝힌 선배들의 유풍선양(遺風宣揚)을 기념하고 진리 자유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쓰이고 있다. 연희관이라 부르게 된 것은 1957년 “연희”와 “세브란스”가 통합될 때 “연희”란 이름을 남기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한편 연희관 인근으 아름다운 캠퍼스에서는 “엽기적인 그녀”와 “클래식”등 많은 한국영화 촬영지로 이용되고 있다.
본관과 별관 2개 동으로 이루어진 상경관은 1996년 6월 당시 상경대학 동문회장이었던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상경대학 동문들의 기부금으로 건립되었다.
본관은 학부강의실, 연구실, 대학원강의실, 행정실로 사용되고 있으며, 별관은 연구소, 고시반 학부.대학원 독서실, 상경대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완공 당시 건물의 명칭을 “이한열관”으로 하자는 논의도 있었으나, 상경대학 동문인 김우중씨와 대우그룹의 기여를 기념하여 이사회에서 “김우중기념관”, “대우관”으로
결정하였다. 현재 상경대학, 경영대학, 경영대학원, 경제대학원에서 사용하고 있다.
빌링슬리관(Billingsley Hall)은 빌링슬리가 주선한 미국 감리교 여선교회 기부금과 학교 재단의 재정 원조로 1968년 4월 착공하여 같은 해 10월 완공한 석조 3층 건물이다.
한국 최초의 가정대학 단독건물인 이 건물은 가정대학의 특색에 맞게 주로 실습실로 이루어져 있다.
신축교사가 준공됨에 따라 정법대학과 함께 광복관을 사용하던 가정대학은 자체의 건물을 갖게 되었다.
1999년 가정대학이 새로 지은 삼성관으로 이전하면서, 현재 언론홍보대학원과 사회과학대학에서 사용하고 있다.
위당관은 1996년 8월 제2인문관으로 준공된 건물이다. 지하 1층, 지상 6층의 이 건물에는 문과대학 소속 일부 학과의 교수연구실과 강의실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3층에는
국학 연구원, 4층에는 언어정보연구원, 5층에는 인문과학연구소와 무악서당, 6층에는 문과대학 도서관이 있다.
2001년 민족사관 정립과 국학 진흥에 헌신한 위당 정인보 선생을 기리기 위해 위당관이라 이름하였다.
외솔관과 위당관 사이에 위치한 종합관은 교양교육의 강화를 위해 1970년 5월에 기공하여 1972년 1월 완공한 6층 건물이다. 계단식 강의실, 특수교실, 일반교실 등에 시청각 관련 현대식 부대시설을 갖춘 교양과목 종합교실동으로, 2층에는 교육대학원이 자리잡고 있다.
1996년 8월 한총련 시위사태로 약 2년간 사용을 못하다가 일반 사회인사들과 연세인의 모금으로 전면 개·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2003년 설치한 전망식 엘리베이터는 신촌 캠퍼스의 아름다운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명소로 손꼽힌다.
백양로 끝 왼편 언덕에 자리한 외솔관은 지하 1층, 지상 6층의 석조건물로, 1982년 봄 교수연구실과 강의실을 갖춘 문과대학 전용의 인문관으로 완공되었다. 문과대학은 인문관의 완공과 더불어 바로 옆의 종합관을 연결하여 연구와 수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하나의 교실단을 구축하였다.
1991년 3월에는 종합관과 사이에 연결 복도를 증축하여 문과대학 학생들의 자치공간과 학습공간을 마련하였다. 평생을 한글운동에 헌신한 외솔 최현배 선생을 기리어 2001년 건물의 명칭을 인문관에서 외솔관으로 변경하였다.
윤동주는 민족의 수난기였던 1917년 독립운동의 거점 북간도 명동에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고, 1938년 봄 연희동산을 찾아 1941년에 문과를 마쳤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펼치던 중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꾸오까 형무소에서 모진 형벌로 29세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가 이 동산을 거닐며 지은 시들은 암흑기 민족문화의 마지막 등불로서 겨레의 가슴을 울렸으며, 그 영향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1968년 11월 3일 그를 따르고 아끼는 학생, 친지, 동문, 동학들이 정성을 모아 핀슨관 앞 작은 언덕에 그의 시 한수를 새겨 시비를 세웠다.
현재의 광복관은 2000년 법학과 창립 50주년을 계기로 추진된 연세법학 발전사업의 하나로 옛 광복관을 허물고, 그 터에 2000년 5월에 신축된 건물로 당시에는 교육관으로 불렸다. 1층은 정법대학, 2층은 대학원, 3층은 도서관으로 사용되다가 1981년 정법대학이 사회과학대학과 법과대학으로 분리된 이후 사회과학대학의 전용건물이 되었다. 1984년 사회과하개학이 연희관으로 이주한 뒤, 용재관으로 옮겨온 법과대학이 이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광복관'이라는 명칭은 일제의 탄압 아래서도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치며 조국과 연세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유억겸, 이춘호, 이묘묵 교수와 납북된 정인보·이순탁 교수 그리고 백낙준·최현배·홍승국 교수의 공을 기리기 위해 1968년 이사회에서 붙인 이름이다.
‘연세 백년을 향한 마스터 플랜’에 따라 1977년 5월에 착공 1979년 3월 30일에 준공을 본 중앙도서관은 오늘의 연세교육에 부과된 사명과 책임을 수행하려는 의지의 표상이며 연세학문의 발전과 문화창조의 원천이다. 본 도서관은 4,747평의 대지 위에 열람인원 4,600석, 장서소장능력 100만권을 목표로 세워진 연면적 5,210평의 건물로 1992년 증축되어 연면적은 5,856평으로 늘어났다. 지상 5층, 지하 1층, 옥탑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민간건축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화강석 석조건물이다. 특별히 미국 AID자금 1백만불을 무상원조 받아 도서관내 컴퓨터시설비, 냉난방 기계설치비 일부 및 도서관내의 모든 비품을 마련하였다.
연세대는 교환학생, 어학 연수생, 정규 유학생을 포함한 외국인학생수가 2002년 기준, 4329명으로 국내에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유학생에 대한 교내 공간 제공을 위해 설립된 글로벌 라운지는 연세대학교 학생회관에 위치하며 전세계의 다양한 방송과 인터넷 뉴스를 직접 서비스하는 인터넷 카페의 개념이다. 이곳에서는 외국학생과 연세대학생이 직접 만나거나 LAN과 컴퓨터를 통한 온라인 만남을 갖기도 하며, 세미나 및 개인 작업등의 다양한 용도를 위한 방음장치의 세미나룸이 있다. 또한 재학생과 외국인 학생을 버디로 묶어주는 버디 프로그램 및 언어교환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기도 한다.
1885년 미국인 선교사 겸 의사 호레이스 앨런이 고종의 도움으로 서울 재동에 세운 왕립 의료기관이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이었던 광혜원은 개원
12일만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지금의 외교통상부)의 계(啓)에 따라 이름을 제중원(濟衆院)으로 바뀌었는데,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운영권이 넘어간 제중원의 부속 의학교 초대 교장 에비슨이 세브란스병원의 실질적 설립자다. 이후 1904년 9월 3일 서울 남대문 밖 복숭아골(지금의 도동)에
세브란스병원이 문을 열었다. 세브란스라는 이름은 병원 설립 자금 15,000달러를 기부한 미국 클리블랜드의 재력가 루이 세브란스에게서 따온 것이며 이 의료기관의 기원이 바로 광혜원이다. 세브란스병원과 거기 딸린 세브란스 의학교의 역사는 한국의 근대적 의료사의학사의 중추를 이룬다.
세브란스 의학교는 세브란스 연합 의학전문학교,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거쳐 1957년 연희대학교와 함께 연세대학교로 통합되면서 연세대 의과대학이 되었고,
세브란스병원은 두 대학 통합 뒤인 1962년 신촌의 현재 자리로 이전해 연세의료원의 핵심이 되었다.
현재 연세대학교 캠퍼스 내의 광혜원은 최초 설립된 광혜원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