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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개

원주(原州)캠퍼스의 설립(設立)과 의의(意義)

우리대학교(大學校) 원주(原州)캠퍼스의 설립(設立)을 회고하면서, 당시(當時)의 시대적(時代的) 상황(狀況)과 의의(意義)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977년(年) 12월(月) 27일(日)에 문교부(文敎部)는 수도권(首都圈) 인구집중(人口集中)을 억제하기 위한 대학교육정책(大學敎育政策)을 공포(公布)하였는데, 그 내용(內容)을 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서울시내(市內) 기존(旣存) 대학(大學)의 증원(增員)을 불허(不許)한다.
 둘째, 이에 따라 서울에 있는 대학(大學)들은 지방분교(地方分校) 설치(設置)를 권면한다.
 셋째, 지방대학(地方大學)들은 단과대학(單科大學)에서 종합대학(綜合大學) 또는 학생(學生) 증원(增員) 요청(要請)을 중대(重大)하게 처리한다.
 넷째, 장학금(獎學金) 지급(支給)을 서울 40, 지방(地方) 60으로 조정한다.
 다섯째, 지방(地方) 대학생(大學生)의 서울대학(大學) 소재(所在) 대학편입(大學編入)도 일체 허락하지 않는다.」

 이 대학교육정책(大學敎育政策)이 공포(公布)된 후(後), 서울소재(所在) 대학(大學)들은 지방(地方)에 분교(分校)를 설치(設置)하느냐, 설치(設置)하면 어떤 분야(分野)를 어떤 곳에 설치(設置)하느냐 하는 심각(深刻)한 문제(門題)에 임(臨)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狀況) 속에서 우리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는 교수진(敎授陣)이나 시설(施設) 면(面)에서 학생증원(學生增員)이 있어도 교육(敎育)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고, 학생증원(學生增員)을 절실(切實)하게 바라고 있던 의과대학(醫科大學)은 서울에서의 증원(增員)이 불가능(不可能)하면 원주(原州)에서 원주기독병원(原州基督病院)을 부속병원(附屬病院)으로 한 의과대학(醫科大學) 분교(分校) 설립(設立)을 문교부(文敎部)에 신청(申請)하게 되었습니다.

 1977년(年) 12월(月) 28일(日)에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의과대학(醫科大學) 원주분교(原州分校)의 설립인가(設立認可)를 입학정원(入學定員) 40명(名)으로 문교부(文敎部)로부터 받았습니다.

 당시(當時) 강원도(江原道)와 충청북도(忠淸北道)에는 의과대학(醫科大學)이 전연(全然) 없었고, 이 지역(地域)의 의료(醫療)를 담당할 의사(醫師)의 육성(育成)이 절실(切實)하게 요망(要望)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地域)의 의과대학(醫科大學) 설립(設立)은 서울지역(地域)의 인구분산정책(人口分散政策)과 원주시민(原州市民)의 염원(念願)에 호응(呼應)하면서, 원주지역(原州地域)뿐만 아니라 강원도(江原道) 지역(地域)의 사회발전(社會發展)에도 우리 대학교(大學校)가 참여(參與)한다는 의미(意味)도 함께 포함(包含)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1959년(年)에 설립(設立)되었고 강원도(江原道)에서 가장 우수(優秀)한 의료진(醫療陣)과 시설(施設)을 갖고 있다고 자부(自負)하는 종합병원(綜合病院)인 원주기독병원(原州基督病院)이 1976년(年)에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에 통합(統合)되어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의과대학교(醫科大學校) 부속병원(附屬病院)으로 되어 있었고, 더욱 본교(本敎) 의과대학(醫科大學)의 지원(支援)을 받을 수 있어서 분교(分校)이지만 처음으로 이 지역(地域)에 의과대학(醫科大學)이 탄생(誕生)하게 되고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는 제(第)2의 의과대학(醫科大學)을 갖게 된 것입니다.

 1978년(年) 3월(月) 6일(日)에 원주기독병원(原州基督病院) 뜰에서 원주분교(原州分校) 개강식(開講式)이 있었습니다.

 원주분교(原州分校)에서의 의학교육(醫學敎育)은 본교(本敎)에서 4학기(學期)인 예과과정(豫科課程)을 3학기(學期)에 이수(履修)하게 하고, 임상실습(臨床實習)을 강화(强化)하여 일찍부터 환자(患者)와의 접촉(接觸)을 갖게 하려는 시도(試圖)이었습니다.

 1978년(年) 10월(月) 6일(日)에 원주분교(原州分校) 의학과(醫學科) 입학정원(入學定員)이 40명(名)이 증원(增員)되어, 기존인원(旣存人員) 40명(名)과 합계(合計) 80명(名)이 되고, 동시(同時)에 보건학과(保健學科)가 입학정원(入學定員) 80명(名)으로 원주분교(原州分校) 안에 설립(設立)되는 인가(認可)를 문교부(文敎部)로부터 받았습니다.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는 이미 1967년(年)에 대학원(大學院) 보건학과(保健學科), 1977년(年)에 보건대학원(保健大學院)이 설립(設立)되어 있었으나 학부(學部)과정에는 보건학과(保健學科)가 없었습니다. 보건학과(保健學科)를 서울소재(所在) 의과대학(醫科大學) 안의 설립(設立)을 문교부(文敎部)에 신청(申請)하였으나, 이것이 원주분교(原州分校) 안에 설치(設置)하는 것으로 인가(認可)되었습니다.

 원주분교(原州分校) 안에 보건학과(保健學科)의 설립인가(設立認可)가 난 것은 의과대학(醫科大學) 원주분교(原州分校) 인가(認可) 때와 같이 당시(當時)의 강력(强力)한 수도권(首都圈) 인구분산정책(人口分散政策)과 원주기독병원(原州基督病院)에 보건의료교육(保健醫療敎育)의 기초(基礎)가 되는 의료(醫療) 인력(人力)과 시설(施設)을 갖추고 있었고, 더욱 본교(本敎) 의과대학(醫科大學)의 보건학(保健學) 교수(敎授)들의 지원(支援)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 진 것입니다.

 당시(當時) 보건학과(保健學科) 설치(設置)가 서울소재(所在) 의과대학(醫科大學)에서가 아니고 원주분교(原州分校)에 된 것에 대하여 이를 받아 드릴 것인가 하는 문제(問題)를 신중(愼重)한 논의(論議) 끝에 받아드리기로 결정(決定)하였습니다. 우리대학교(大學校)에 4년제(年制) 보건학과(保健學科)가 설치(設置)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이고 책임(責任)이 매우 무겁게 되었습니다.

 보건학과(保健學科)의 교육과정(敎育課程)은 첫 1학년(學年)에서 교양과목(敎養科目)을 이수(履修)하고, 2학년(學年) 때부터 보건행정(保健行政), 환경과학(環境科學), 의용공학(醫用工學), 임상병리학(臨床病理學), 재활학(再活學)의 5개(個) 전공분야(專功分野)로 나누어 실시(實施)하기로 하였습니다. 교육내용(敎育內容)은 미국(美國)의 보건대학(保健大學) 교육과정(敎育課程)을 모델로 하였습니다.

 1979년(年) 1월(月) 11일(日)에 원주기독병원(原州基督病院) 안에 의학관(醫學館) 공사(工事)의 정조식(正條植)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의학관(醫學館) 건물(建物)은 우선은 지하(地下) 1층(層), 지상(地上) 3층(層)까지 건립(建立)하기로 하였으나, 추후 보건대학(保健大學)이나 간호대학(看護大學) 등의 교육기관(敎育機關)을 확대(擴大)할 의도(意圖)로 10층(層)까지 올릴 수 있도록 기초공사(基礎工事)를 실시(實施)하기로 하였습니다.

 원주(原州)에 의학과(醫學科)와 보건학과(保健學科)가 설립(設立)된 후(後), 이 이외(以外) 학과(學科)의 분교(分校)도 설립(設立)하느냐 하는 문제(問題)가 심각(深刻)하게 대두(擡頭)되었습니다.

 서울에 소재(所在)하고 있는 많은 대학(大學)들이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가 원주분교(原州分校)를 설치(設置)하는 것을 보고 교세(敎勢) 확장(擴張)을 위해 분교(分校)를 설치(設置)하는 경향(傾向)이 많아졌습니다.

 1978년(年) 3월(月)에 단국대학교(檀國大學校)가 천안(天安)캠퍼스를 개교(開校)하였고, 같은 해 11월(月)에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가 경주(慶州)캠퍼스를 설립(設立)하였습니다. 그리고 1979년(年) 1월(月)에 한양대학교(漢陽大學校)가 안산(安山)캠퍼스를 신설(新設)하였고, 1980년(年) 1월(月)에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가 조치원(鳥致院) 분교(分校)를 설치(設置)하였고, 같은 때 건국대학교(建國大學校)가 충주(忠州)에 제(第)2캠퍼스를 설립(設立)하였습니다.

 이런 상황(狀況) 속에서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도 교세(敎勢) 확장(擴張)을 위해 의과대학(醫科大學)의 분교(分校)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分野)의 분교(分校)도 설립(設立)하는 것에 많은 교수(敎授)들과 동문(同門)들의 찬동(贊同)을 얻어,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분교(分校)를 설립(設立)하는 방침(方針)을 확정(確定)하고 제(第)2캠퍼스의 위치(位置)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의과대학(醫科大學) 분교(分校)는 원주기독병원(原州基督病院)이 원주(原州)에 있었기에 당연(當然)하게 그곳에 설치(設置)하게 되었는데, 그 이외(以外)의 분야(分野)에 한해서는 원주(原州) 이외(以外)의 지역(地域)에 설치(設置)할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의견(意見)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의과대학(醫科大學)이 분교(分校)를 원주(原州)에 이미 설치(設置)하였으니, 분교(分校)의 모든 학과(學科)가 한 지역(地域)에 있으면서 상호유대(相互紐帶)를 가져야 한다는 의견(意見)이 지배적(支配的)이어서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제(第)2캠퍼스를 원주지역(原州地域)에 두기로 결정(決定)하였습니다.

 원주분교(原州分校)에 인문·사회분야(人文·社會分野)와 자연과학분야(自然科學分野)의 학과(學科) 설치(設置)를 문교부(文敎部)에 신청(申請)하여, 1981년(年) 1월(月)에 영어영문학과(英語英文學科), 경제학과(經濟學科), 경영학과(經營學科), 수학과(數學科), 물리학과(物理學科), 화학과(化學科), 생물학과(生物學科)의 7개(個) 학과 설립(設立)을 인가(認可)받았습니다. 이를 기(期)하여 의과대학(醫科大學) 원주분교(原州分校)는 원주대학(原州大學)으로 승격(昇格)되었습니다.

 원주대학(原州大學)은 기존(旣存)의 3개(個) 학과(學科)에 신설(新設)의 7개(個) 학과(學科)가 증가(增加)된 10개(個) 학과(學科)로 구성(構成)하게 되었습니다.

 1982년(年) 10월(月)에 원주대학(原州大學) 안에 국어국문학과(國語國文學科), 행정학과(行政學科), 법학과(法學科)의 증과(璔科)가 승인(承認)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1983학년도(學年度)부터 하나의 단과대학(單科大學)이었던 원주대학(原州大學)은 인문·사회분야(人文·社會分野)와 자연과학분야(自然科學分野)로 구성(構成)된 원주대학(原州大學)과 의학·보건분야(醫學·保健分野)인 의과대학(醫科大學)의 두 단과대학(單科大學)으로 발전(發展)되었습니다.

 1984년(年) 10월(月)에 원주대학(原州大學)이 국어국문학과(國語國文學科), 영어영문학과(英語英文學科), 수학과(數學科), 물리학과(物理學科), 화학과(化學科), 생물학과(生物學科)의 6개(個) 학과(學科)로 구성(構成)된 문리대학(文理大學)과 경제학과(經濟學科), 경영학과(經營學科), 행정학과(行政學科), 법학과(法學科)의 4개(個) 학과(學科)로 구성(構成)된 경법대학(經法大學)의 두 단과대학(單科大學)으로 분리(分離)되었습니다.

 1986년(年) 11월(月)에 원주의과대학(原州醫科大學)의 한 학과(學科)로 속(屬)해 있던 보건학과(保健學科)가 보건과학대학(保健科學大學)이라는 단과대학(單科大學)으로의 승격(昇格) 인가(認可)를 받았습니다. 다음해인 1987년(年) 3월(月)에 발족(發足)된 보건과학대학(保健科學大學)에는 그때까지 전공(專攻)으로 되어 있던 것이 학과(學科)로 승격(昇格)되면서, 보건행정과(保健行政科), 환경과학과(環境科學科), 임상병리학과(臨床病理學科), 재활학과(再活學科), 의용공학과(醫用工學科)의 5개(個) 학과(學科)가 속(屬)하게 되었습니다.

 원주분교(原州分校)가 설립(設立)된 지 10년(年)도 되지 않은 1986년(年)에 17개(個) 학과(學科), 4개(個) 단과대학(單科大學)으로 되었고, 재적(在籍) 학생(學生) 수(數)는 문리대학(文理大學)이 1,305명(名), 경법대학(經法大學)이 1,020명(名), 원주의과대학(原州醫科大學)이 665명(名), 보건과학대학(保健科學大學)이 518명(名), 합계(合計) 3,508명(名)이 되었습니다.

 이 숫자(數字)는 연희대학교(延禧大學校)와 세브란스가 합병(合倂)한 1957년(年)의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의 학생재적수(學生在籍數) 3,615명(名)과 대등(對等)한 것입니다.

 이제 원주(原州) 매지(梅芝)캠퍼스 조성과정(助成過程)에 대(対)하여 언급(言及)하겠습니다.

 1979년(年) 12월(月)에 원주분교(原州分校) 조성계획(助成計劃)을 수립(樹立)하고, 이를 이사회(理事會) 재정관재위원회(財政管財委員會)에 상정(上程)하여 분교(分校) 교지(校地) 매입승인(買入承認)을 받아 교지(校地) 후보지(候補地)를 찾기 시작(始作)하였습니다.

 첫 번째, 후보지(候補地)로 원주시(原州市) 태장동 280번지(番地) 일대(一帶) 271필지(筆地) 약 32만평(蔓平)을 선정(選定)하여 원주시(原州市)에 도시계획(都市計劃) 시설(施設) 결정(決定)을 상정(上程)하려고 하였으나, 부지 내에 설치(設置)되어 있는 군사(軍事) 시설물(施設物) 제거(除去) 문제(問題)가 어렵게 되어 이를 포기하였습니다.

 두 번째 후보지(候補地)로 원주시(原州市) 무실동(茂實洞) 약 30만평(蔓平)을 조사(調査)하려고 하였으나, 이 지역(地域) 주변(周邊)에 원주교도소(原州矯導所)가 있어 이 지역(地域)도 포기하기로 하였습니다.

 세 번째 후보지(候補地)로 원성군(原城郡) 흥업면(興業面) 매지리(梅芝里), 대안리(大安里), 흥업리(興業里)의 3개(個) 지역(地域)을 조사(調査)하고, 매지리(梅芝里)에 있는 357필지(筆地) 약 56만평(蔓平)을 선정(選定)하여 최종(最終) 후보지(候補地)로 하였습니다.

 매지리(梅芝里) 캠퍼스는 산(山)기슭이 비교적(比較的) 넓은 평지(平地)로 되어 있으면서 앞에 넓고 아름다운 매지호(梅芝湖)를 두고 있고, 멀리 높은 치악산(雉岳山)과 백운산(白雲山)이 바라보이어서, 밖에서 속을 들여다보는 경관(景觀)이나, 속에서 밖을 내다보는 경관(景觀)이 다 같이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더욱 원주시(原州市)에서 군사용지(軍事用地)가 있는 북(北)쪽보다 더욱 발전(發展)될 가능성(可能性)이 있다고 보여지는 남(南)쪽에 충주시(忠州市)로 가는 도로(道路) 옆에 위치(位置)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당시(當時) 토지가격(土地價格)이 비교적(比較的) 저렴(低廉)하여 같은 금액(金額)으로 보다 넓은 토지(土地)를 매입(買入)할 수 있었습니다.

 선인(先人)들이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의 서울캠퍼스를 택(擇)할 때 장기적(長期的)인 안목으로 시내(市內)에서 멀어도 넓고 아름다운 경기도(京畿道) 고양군(高陽郡) 연희면(延禧面) 창천리(滄川里)를 택(擇)한 것과 같이,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의 제2캠퍼스를 시내(市內)에서 멀어도 넓고 아름다운 강원도(江原道) 원성군(原城郡) 흥업면(興業面) 매지리(梅芝里)를 택(擇)하기로 하였습니다.

 1981년(年) 4월(月) 28일(日)에 개최(開催)된 이사회(理事會)에서 교지선정(校地選定) 및 매입권한(買入權限)을 이사장(이천환)(理事長(李天煥))과 총장(안세희)(總長(安世熙))에게 위임(委任)하여 시행(施行)하도록 결의(決議)하고, 구체적(具體的)인 사업추진(事業推進)을 법인사무처장(최기준)(法人事務處長(崔起俊))에게 위임(委任)하게 되었습니다.

 1981년(年) 5월(月)에 교지매입(校地買入)을 실행(實行)하기 위해 매지리(梅芝里) 이장(里長)을 대표(代表)로 한 현지주민(現地住民) 10명(名)을 추진위원(推進委員)으로 하여 매각(賣却)하겠다는 동의(動議)를 받아 매입(買入)에 따른 조건(條件) 합의서(合議書)를 작성(作成)하게 되었습니다.

 1981년(年) 7월(月)에 매입(買入)부지 내(內)에 편입(編入)되는 전(前) 지번(地番)에 대하여 토지대장(土地臺帳)과 등기(登記)등본 대조작업(作業)을 실시(實施)하여, 토지(土地) 382필지(筆地)의 총(總) 566,940평(平), 건물(建物) 132필지(筆地) 1,266평(平) 이었습니다.

 토지매입(土地買入)에 있어서 토지가격(土地價格) 결정(決定), 농지(農地)를 교육용지(敎育用地)로 전환(轉換)하는 문제(問題) 등 어려운 과제(課題)가 있었으나, 1981년(年) 8월(月) 17일(日)까지 190필지(筆地), 1982년(年) 2월(月) 24일(日)까지 272필지(筆地)를 매입(買入) 완료(完了)하였습니다.

 토지(土地)를 매입(買入)하면서 원주(原州)캠퍼스의 마스터 플랜을 만들었습니다. 마스터 플랜 속의 건물(建物) 및 시설(施設) 배치(配置)는 우선 대학(大學) 기능(機能)을 고려(考慮)하여 캠퍼스 전체를 크게 4개(個)의 지역(地域)으로 구분(區分)하였습니다.

 제(第)1지역(地域)에는 주로 교육시설(敎育施設)을 서로 근접시켜 배치(配置)함으로써 그 효율(效率)을 높이고, 인접(隣接) 학문(學問) 간의 교류(交流)가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하였습니다.

 제(第)2지역(地域)에는 대학본부(大學本部), 도서관(圖書館), 강당(講堂), 학생회관(學生會館)을 두되, 제(第)1지역(地域)의 교육시설과 근접시킴으로써 그 지원이 원활하도록 계획하였습니다.

 제(第)3지역(地域)에는 남녀학생(男女學生) 기숙사(寄宿舍)와 교수(敎授)를 위한 영빈관(迎賓館)을 설치(設置)하도록 하였습니다.

 제(第)1,2지역(地域)과 제(第)3지역(地域) 사이를 제(第)4지역(地域)으로 설정(設定)하고, 그곳에 운동장(運動場), 야구장(野球場), 실내체육관(室內體育館) 등을 설치(設置)하여 그 사용(使用)이 편리(便利)하도록 계획(計劃)하였습니다.

 원주(原州)캠퍼스의 마스터 플랜에 따른 도로(道路)와 교량(橋梁)과 상하수도(上下水道)의 토목공사(土木工事)와 5개동(個棟)의 건물(建物)에 대한 건축공사(建築工事)를 제(第)1차적(次的)으로 수행(遂行)하는 데 앞서 1982년(年) 10월(月) 28일(日)에 기공식(起工式)이 있었습니다.

 제(第)1차(次)로 기공(起工)된 5개동(個棟) 건물(建物)의 개요(開耀)는 강의실(講義室)과 교수실(敎授室)이 들어있는 2,158평(平)의 인문관(人文館), 강의실(講義室)과 실험실(實驗室)과 교수실(敎授室)이 들어있는 3,134평(平)의 과학관(科學館), 420명(名)의 수용능력(收容能力)을 갖는 1,784평(平)의 남자기숙사(男子寄宿舍), 210명(名)의 수용능력(收容能力)을 갖는 891평(平)의 여자기숙사(女子寄宿舍), 그리고 원주(原州)캠퍼스에 출강(出講)하게 되는 교수(敎授)의 숙소(宿所)인 462평(平)의 영빈관(迎賓館)이었습니다.

 당시(當時) 본인(本人)이 파악(把握)한 원주(原州)캠퍼스 설립(設立)의 의의(意義)를 되돌아 보기위하여 기공사(起工辭)의 일부(一部)를 인용(引用)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교육(敎育) 100년(年)의 역사(歷史)를 자랑하는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가 기독교(基督敎) 신앙(信仰)에 기초한 진리(眞理)와 자유(自由)라는 연세정신(延世情神)을 선양하고 우리 선학(先學)들이 닦아 놓은 연세동문(延世同門)의 탁월성(卓越性)을 발휘하며 연세(延世)의 교육적 전통에 의하여 세워진 연세교육(延世敎育)의 제(第)2의 도장(道場)이 될 원주대학(原州大學) 건설기공(建設起工)의 역사적(歷史的) 현장(現場)에 서있습니다.

 연세(延世)의 선인(先人)들이 당시(當時) 경기도(京畿道) 고양군(高陽郡) 연희면(延禧面)이었던 지금의 연세(延世)동산에 연세교육(延世敎育)의 터전의 건설(建設)이 시작된 지 65년(年) 만에 강원도(江原道) 원성군(原城郡) 흥업면(興業面) 매지리(梅芝里)에 제(第)2의 연세교육(延世敎育)의 터전을 건설(建設)하기 위하여, 오늘 기공(起工)의 삽을 들게 되었음을 생각할 때, 우리의 감회(感懷)는 크며 그 만큼 우리의 책임(責任)은 무거워짐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의 제(第)2의 교장(敎場)인 이 원주대학(原州大學)이 연세(延世)의 건학정신(建學情神)을 확산(擴散)하고 연세(延世)의 교육성과(敎育成果)를 확대(擴大)하며 연세(延世)의 교세(敎勢)를 사해(四海)로 확장(擴張)하는데 동참하며 연세(延世)가 그 교육적(敎育的) 역량(力量)을 바탕으로 한국(韓國)의 대학(大學)에서 세계(世界)의 대학(大學)으로 비상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원주대학(原州大學)의 교수(敎授)들과 학생(學生)들이 고대(苦待)하던 원주(原州)캠퍼스의 제(第)1차(次) 공사(工事)가 1년(年) 8개월(個月) 만에 완료(完了)되어 1984년(年) 8월(月) 16일(日)에 봉헌식(奉獻式)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식(式)에서 본인(本人)이 드린 봉헌사(奉獻辭)의 일부(一部)를 인용(引用)하겠습니다.

 「이 원주대학(原州大學) 캠퍼스가 오늘의 이 짜임새 있는 아담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많은 사람의 협조(協助)가 있어야 했고 많은 노력(努力)이 경주(傾注)되어야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땅을 마련하는데 소요(所要)되는 자금(資金)을 기꺼이 기부(寄附)하여 주신 독지가(篤志家)가 있었음을 밝히며 그분에게 깊은 감사(感謝)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 지역(地域) 안에 산재(散在)해 있던 2개(個)의 마을 주민(住民)들의 이해(理解)와 협조(協助)로 오랜 생활(生活)의 터전에서 옮겨 갔으며 이에 협력(協力)하여 주신 지역주민(地域住民)과 유지(有志) 여러분께 진심(眞心)으로 사의(謝意)를 표(表)합니다.

 그리고 또한 아무런 시설(施設)이 없었던 이 터전에 독자적(獨自的)인 상수도(上水道) 시설(施設)과 하수처리(下水處理) 시설(施設)을 마련했으며 전기선(電氣線)과 전화선(電話線)을 끌어들이고 도로(道路)와 교량을 놓고 연면적 8,429평에 해당하는 5개동의 건물의 건설이라는 글자 그대로 상전벽해를 방불케 하는 대역사가 강행되었습니다. 이 공사를 설계하고 시공한 여러분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원주대학(原州大學)은 새로운 캠퍼스를 마련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진리(眞理)의 샘이 솟고 자유(自由)의 횃불이 빛나며 연세(延世)의 교육이념(敎育理念)이 피어남으로써 연세(延世)의 교육성과(敎育成果)가 확대(擴大)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교세(敎勢)의 확장(擴張)을 통(通)하여 연세(延世)가 한국(韓國)의 대학(大學)에서 세계(世界)의 대학(大學)으로 비상하는데 큰 몫을 담당하기를 기대(期待)하는 바입니다.」

 앞서 인용(引用)한 기공사(起工辭)와 지금 인용(引用)한 봉헌사(奉獻辭)의 일부(一部)에서 당시(當時) 원주(原州)에 있는 대학설립(大學設立)의 과정(過程)과 의의(意義)를 조금이라도 이해(理解)할 수 있었으면 다행(多幸)하게 생각합니다.

 본인(本人)은 총장(總長)으로 재임(在任)하고 있을 당시(當時) 원주(原州)캠퍼스가 아름다운 매지리(梅芝里)에 선정(選定)되고,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가 어려운 재정상황(財政狀況) 속에 있을 때 김우중(金宇中) 회장(會長)으로부터 기부금(寄附金)을 받아 교지(校地)를 매입(買入)하게 되고, 30년(年)이 된 오늘날 이 캠퍼스가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지고, 더욱 많은 건물(建物)이 세워지고, 더욱 값지게 활용(活用)되고 있음을 볼 때, 참으로 감사(感謝)하고, 보람되고, 기쁘고, 감회(感懷)가 무량(無量)합니다.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설립(設立) 당시(當時) 애쓰신 여러분, 교지(校地) 매입(買入) 시(時) 수고(受膏)하신 여러분, 그리고 그동안 이곳에서 헌신(獻身)하신 여러분에게 진심(眞心)으로 감사(感謝)와 치하(致賀)를 드립니다.

 끝으로 설립(設立)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도(引導)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恩惠)에 감사(感謝)드리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총(恩寵)가운데 원주(原州)에 있는 대학(大學)이 더욱 큰 발전(發展)으로 이어지기를 간곡히 기원(祈願)합니다.

 이 자리에서 말씀을 드릴 수 있게 초청(招請)하여 주신 분과 자리를 같이하여 경청(敬聽)하여 주신 여러분께 감사(感謝)합니다.

 

2009년(年)  5월(月)  26일(日)

연세대학교 제9~10대 총장

안 세 희(安 世 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