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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Impact Makers]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갑니다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4-01-25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갑니다

수많은 장애인의 다리가 돼 준 20년, 푸르메재단 백경학 대표(사학 83)



2023년 11월 27일, 백경학 동문은 푸르메재단의 상임이사에서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2005년 푸르메재단을 설립하고 실무를 이끌어 온 백 대표는 이제 푸르메재단을 책임지게 됐다. 그리고 12월 6일, 백 대표는 한국의 100여 곳 비영리 기관 활동가들이 심사하는 ‘2023 아시아 필란트로피 어워드(Asia Philanthropy Awards)’에서 올해의 필란트로피스트상을 수상했다. 올해의 필란트로피스트상은 NGO 활동에 기여한 숨은 영웅을 찾자는 취지로 민간 영역에서 만든 상이라 더욱 의미 있고 영광스러운 상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온 푸르메재단의 진정성이 크게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재활 병원을 설립하기로 결심하다

1998년 여름이었다. 우리 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CBS 기자로 일하던 백경학 대표는 독일 뮌헨대 정치연구소에서 2년간 방문 연구원으로 통일 문제를 연구하고 귀국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서울시 5급 공무원으로 일하다 독일 연수에 동행한 아내와 추억을 남기고자 귀국 직전 영국으로 자동차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마치면 뮌헨에서 짐을 챙겨 귀국할 일정만 남은 상태였다. 스코틀랜드의 시야가 툭 터진 오르막길에서 자동차 트렁크의 물건을 꺼내기 위해 비상등을 켠 채 차를 세웠다. 그 한순간에 일생일대의 불행이 찾아왔다. 두통약을 먹고 정신이 오락가락한 가해자 차량의 추돌로 굉음과 함께 차 뒤편에 서 있던 아내와 함께 정신을 잃은 것이다. 아내는 다리를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으며 생사의 기로에 섰고 백 대표 또한 크게 다쳤다. 백 대표는 큰 골절 없이 회복됐지만, 아내는 100일 동안 의식 불명 상태로 큰 수술을 세 차례나 받았다. 아내를 잃는 줄 알았던 백 대표는 위기를 넘기는 기적을 경험했고, 독일로 건너와 1년 반 동안 재활 치료를 받은 뒤 귀국했다.



“1998년 사고 당시 우리 부부는 서른여섯, 서른넷이었어요. 영국의 병원은 시설이나 시스템이 독일보다는 못했지만, 더없이 환자를 이해하며 친절했죠. 뮌헨에서는 의료진이 딱딱했지만, 철저히 환자 중심이었고 쾌적했어요. 환자에게 필요한 것을 잘 충족시켜 줬고 퇴원해서 가족의 도움 없이 스스로 살아갈 방법까지 훈련시켰어요.”


영국과 독일의 의료를 경험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백 대표 부부는 귀국 사흘 뒤, 국내 재활 병원은 병실이 없어 2~3개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높은 국민 소득을 자랑하며 경제 대국의 반열에 올라온 한국에서 장애인 가족은 유령처럼 병원을 떠돌아야 했다. 여기저기 쫓아다닌 끝에 아내는 2주 만에 입원했고 그마저도 열악한 병실 환경을 겪어야 했다. 독일과 달리 산책할 곳도 없이 좁은 병실은 간병인과 방문객들로 넘쳐났지만 그래도 입원했으니 행복한 축에 속했다. 어린이 재활은 더 열악했다. 경제적 여유가 되는 가정은 외국에서 치료를 받으며 이민을 결정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성인들 틈에서 치료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독일에 정착한다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백 대표는 고국을 떠나서 산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장애인에게 열악한 한국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사회 약자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투신하기로 했다. 직접 재단을 설립해 장애인 재활 병원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재단 법인 설립을 위해 동아일보에 사표를 내다


재단을 설립하려면 자본금이 있어야 한다. 당시 백 대표에게 재산은 집 한 채가 전부였다. 기자로 일하면서 재단 설립 자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과감히 동아일보 기자직을 내려놓고 사업을 시작했다.


백 대표가 선택한 업계는 주류 시장이었다. 뜻이 맞는 동료들과 의기투합해 국내 최초로 하우스 맥주를 생산하는 ‘옥토버훼스트’를 창업했다. 59명의 엔젤 투자자로부터 28억 원의 자본금을 만들어, 사표를 낸 지 8개월 만에 강남역에 옥토버훼스트 1호점을 열었고, 이어서 종로에 2호점을 내고 신촌과 마포까지 뻗어 갔다. 마흔 살이 되기 전에 시작한 모험은 그렇게 결실을 이뤘다. 푸르메재단 설립을 누구보다 응원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아내였다. 끔찍한 사고에도 씩씩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견뎌 온 아내는 사고 후 10년의 소송 끝에 받은 보상금 10억 원을 기부했다. 아내의 헌신은 여러 기부자들의 마음을 얻어 푸르메재단을 설립하는 데 마중물 역할을 했다.


백 대표는 사회적으로 선망과 존경을 받는 사람들을 찾아가 이사회를 만들었다.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을 비롯해 강지원 변호사, 원택 스님, 김용해 신부 등 여러 인사가 이사직을 수락했다.


“2004년 8월 17일 한국프레스센터 19층에서 푸르메재단 창립 발기인 대회를 열었어요.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님은 ‘재활 전문 병원을 건립할 때까지 작은 물방울이 모여 강물을 이루듯 뚜벅뚜벅 걸어가자’고 당부했고, 아내는 그날 밤 감격의 눈물을 흘렸어요. 자신의 다리가 수많은 다리로 재생할 것을 믿었습니다.”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듣다


푸르메재단 설립 이후 그는 현장의 소리를 먼저 듣기 시작했다. 성인 재활 병원을 생각하고 있던 그는 한 중증 장애인의 ‘이가 아파도 치과에서 받아 주지 않는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실제로 그런가 하여, 새문안로에서 종로까지 치과를 찾아가 봤어요. 34개의 치과를 방문했는데 장애인을 치료하겠다는 치과가 없었죠. 일단 입구 자체가 계단이어서 출입이 어려웠어요. 치과마다 장애인 치료는 힘들고 의료 사고 가능성이 높으며, 치료 시간이 오래 걸려 다른 대기 환자의 불만이 높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치료비를 내지 못하는 분이 많다는 이유로 치료가 거절되는 상황이었어요.”


장애인들의 어려움을 파악한 백 대표는 장애인 치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2007년 민간 최초 장애인 전문 치과인 ‘푸르메치과’ 개원으로 푸르메재단의 본격적인 사업이 시작됐다. 이후 2011년 과천시장애인복지관 개관, 2012년 세종마을 푸르메센터 개관, 종로장애인복지관과 종로아이존 개원, 2016년 시민 1만 명의 나눔으로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 개원, 2018년 시립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수탁 등 한결같은 의지로 장애인 가족의 고충을 해결해 왔다. 2022년에는 여주시에 발달 장애 청년들의 일터인 푸르메소셜팜을 세워 일자리를 창출했다. 장애인 청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스스로 식물을 키우고 보살피는 일이라는 데서 착안했다. 푸르메재단의 이러한 발걸음은 푸르메재단을 장애인에게 가장 진심인 곳으로 이름나게 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효자동 푸르메재단 사무실에는 여러 유명 인사의 모습이 액자에 걸려 있다. 푸르메재단을 물심양면 도운 이들이다. 백 대표는 수많은 도움의 손길들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철재 사장은 미국 유학 시절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의 고난을 겪은 분이에요. 천신만고 끝에 졸업 후 벤처 사업가로 성공해 넥슨과 인연을 맺었는데, 우리가 짓는 어린이 재활 의원에 10억 원을 기부해 주셨죠. 이 소식을 접한 김정주 넥슨 대표가 우리를 찾아왔어요. 우리나라에 어린이 재활 전문 병원이 없다는 말에 놀란 김 대표는 그 자리에서 10억 원을 기부했죠. 넥슨 임직원들도 자원봉사로 참여했고 푸르메재활의원을 세울 수 있었어요. 그 후 어린이 100명이 입원하고 하루 500명이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 설립의 꿈을 나눴습니다. 2016년 상암동에 문을 연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은 2년 동안 김정주 대표와 시민 1만 명, 500개 기업의 정성으로 세워졌어요.”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 사진 제공: 푸르메재단)


고(故) 김정주 넥슨 대표는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을 짓는 데 어느 대기업도 하지 못한 200억 원이라는 통 큰 기부를 했다.


“파독 간호사 출신 장애인 김주기 선생님은 2007년 장애인 치과 치료를 받으러 오신 분이에요.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실 당시 월급을 전액 집으로 송금하며 희생적으로 사셨죠. 귀국한 이듬해인 1979년 사고로 뇌를 다쳐 전신 마비를 겪은 뒤 3급 지체 장애인으로 사신 분이에요. 우리 재단을 통해 임플란트 수술을 받은 뒤 매달 정기 기부를 약정하셨어요. 기초 생활 수급자로 월 40만 원을 받고 사시는 분이어서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자신에게 치아를 만들어 줘 음식을 먹고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며 기꺼이 기부하셨어요.”

 

(푸르메소셜팜, 사진 제공: 푸르메재단)


“작년에 장애인 일터인 농장을 짓는 데 땅을 기부한 분이 이상훈, 장춘순 부부예요. 발달 장애 청년을 키우는 부모였죠. 그 부부가 여주시 오학동 4천 평 농장 부지를 기증하셨어요. 대기업을 운영하는 분이 아님에도 자신이 평생 소유한 땅을 푸르메재단에 내어 주셨죠. 아들 이름이 덕희인데 덕희와 같은 친구들 55명이 지금 그 농장에서 일하고 있어요. 한 사람의 결단으로 55명이 평생직장을 갖게 됐습니다.”


부자여서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어도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기부한다. 넉넉하지 않아도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있으면 나눈다. 백 대표는 우리 사회에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경제 상황이 어려우면 후원을 중단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눌 마음이 있는 이들은 어려울 때 오히려 증액한다고 말하며 기부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했다.



무슨 가치로 살 것인가


현재 푸르메재단이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은 수도권의 교통이 편리한 곳에 장애인 희망 일터인 농장을 짓는 것이다.


“여주 푸르메소셜팜은 크기도 크고 유리온실에 태양광을 활용한 온습도 조절 자동화 시스템이 돼 있어요. 하루 550킬로그램의 방울토마토를 생산해 전량 SK하이닉스에 납품합니다. 좋은 가격으로 팔고 있죠. 현재 55명의 청년이 하루 네 시간을 일하고 4대 보험에 125만 원 수입을 얻고 있어요. 올해는 도심형 농장을 지어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할 수 있는 곳에 일터를 만들고자 합니다.”


푸르메재단은 장애 어린이가 진료받는 병원에서 청년들이 일할 수 있는 농장까지 장애인이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데 전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백 대표는 푸르메재단과 같은 비영리 재단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후배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을 남겼다.


“쉽지 않은 길이고 힘든 길이지만 가 볼 만한 길이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직장이 꽃길은 아니죠. 가시밭길을 걷다가 진흙을 만나고 그러다 좋은 길도 만납니다. 어려운 기억은 금세 잊을 수 있고, 기쁘고 행복한 작은 기억은 열 가지 가혹한 길을 이기죠. 한눈팔지 않고 걷다 보면 내가 갈 길이 보일 거예요. 20년을 하면 전문가가 되고 30년을 하면 그 분야에서 우뚝 설 수 있어요.”


백 대표가 바라는 한국 사회는 ‘남을 배려하는 성숙한 사회, 장애인, 노인, 다문화인이 행복한 사회’다. 사회 약자가 행복한 사회이면 모두가 행복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국에 많은 장애인 도움 단체가 있지만 장애인에게 꼭 필요한 여러 방면을 개척하며 묵묵히 한길만을 걸어가고 있는 푸르메재단. 20년 가까이 장애인만을 생각하며 지내 온 인생이 그의 얼굴과 목소리에 녹아 있다.

 

vol.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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