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세소식

[Impact Makers] 이웃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세상을 바꿉니다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3-12-20

이웃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세상을 바꿉니다

국내 NGO의 대부, 굿네이버스 이일하 이사장(신학 65)



세계적인 구호 단체 ‘굿네이버스’는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토종 NGO다. 1991년, 8명의 봉사자가 만든 단출한 모임에서 출발해 당시 128명이던 회원은 어느새 71만 명이 됐고, 전 세계 40여 개국을 지원하는 글로벌 NGO로 성장했다. 그 뒤에는 설립자이자 오랫동안 조직을 이끌어 온 이일하 이사장이 있다. 목회자 대신 사회봉사의 길을 선택해 수많은 사람을 가난과 기아에서 구한 그의 삶은, 그 자체로 우리나라 NGO의 역사다.



우리나라 토종 NGO의 시작

‘한국이웃사랑회’라는 이름으로 1991년 출범한 굿네이버스는 당시 수혜국이던 우리나라를 원조국으로 바꾸며 오늘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NGO로 자리 잡았다. 월드비전에서 18년간 일하며 다양한 사업을 수행한 그는 현장에서 익힌 경험을 바탕으로 굿네이버스를 설립, ‘한국형 NGO’의 모델을 새롭게 만들었다.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대한민국의 위상을 재정립했을 뿐만 아니라, 월 만 원의 후원 회원을 모집하는 방식으로 소액 기부 문화를 확산시켰다.


1996년에는 국내 NGO 중 최초로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가 NGO에 부여하는 최상위 지위인 ‘포괄적 협의 지위’를 획득했으며, 2007년에는 유엔 새천년개발목표의 두 번째 목표인 ‘보편적 초등 교육 달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새천년개발목표상을 수상했다. 2011년에는 국내 NGO 최초로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의 공식 파트너 기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국제 사회에서 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2017년 미국에 ‘글로벌 파트너십 센터(Global Partnership Center, GPC)’를 설립한 굿네이버스는 현재 GPC를 중심으로 글로벌 자원 확보와 네트워크를 강화해 나가며 더 큰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시민운동 개념으로 시작, 소액 기부 문화 확산

영등포에 자리 잡고 있는 굿네이버스 사옥에서 만난 그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언제 이렇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굶주림 없는 세상,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고 동료들과 뜻을 모은 지 30여 년, 없는 길을 만들며 달려온 그에게는 지난 시간이 그저 꿈만 같다.


“저를 포함해 8명의 창립 멤버가 모두 기독교인이었지만 교회에 의지하지 말고, 기업에도 기대지 말자는 데는 생각이 같았어요. 정기적으로 꾸준히 기부하는 회원을 늘려 어려운 이웃을 돕기로 방향을 정하고, 각자 알음알음 회원을 모집했어요. 일종의 시민운동 개념이었죠. 그렇게 128명을 모아 사단법인으로 등록한 것이 굿네이버스의 시작입니다.”



굿네이버스의 첫 사업은 당시 구산동·역촌동 일대 천막촌에서 거주하던 폐결핵 환자들을 돕는 일이었다. 회원 모집이 가장 큰 과제였던 초창기, 8명이 매일 책상에 앉아 편지를 썼다. 처음에는 약사들을 대상으로, ‘한 달에 만 원을 후원해 주면 열악한 환경에서 투병 중인 폐결핵 환자들을 도울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아 무려 2만 명에게 발송했다. 그중 200명이 답을 보내왔다.


후원을 요청하는 NGO의 우편물에 회신하는 비율이 전 세계적으로 평균 0.3%인 것을 감안하면 무려 세 배 이상 높은 수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설립 6개월 만에 1,800명의 회원을 모았다. 이후 3천 명, 5천 명 등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현재 굿네이버스에 공식 등록된 후원자는 71만 명에 이른다.


“기존 후원자들에게는 감사 인사와 함께 기부금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알리는 편지를 보냈어요. 편지 안에는 세 장의 후원 용지를 동봉해, 이렇게 의미 있는 일에 주변 사람들도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해 달라고 부탁했죠. 기금의 투명한 운영과, 후원자들에게 주인 의식을 심어 준 것이 회원을 늘린 동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1,000명에게 편지를 보내면 300명의 후원자가 더 생겼으니까요.”


그는 “우리 국민이 그만큼 정이 많고 따뜻하다는 뜻”이라며 “자발적으로 참여한, 순수한 시민의 힘으로 이만큼 성장했다는 것이 가장 자랑할 만한 대목”이라고 덧붙였다.


설립 이듬해부터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방글라데시 오지 마을에 농장을 마련, 잦은 자연재해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지역 주민에게 한국의 농업 기술을 전수했다. 수도 다카의 빈민 지역에는 모자 보호 센터를 설립해 아동과 여성들을 도왔다. 



아프리카 첫 사업국인 케냐에서는 교육 센터를 설립해 교육 접근성을 향상시키고 클리닉을 열어 기초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 밖에도 여러 나라에서 지역 특성에 맞는 사업장을 만들어 지역 주민의 자활과 자립을 도왔다.


2010년부터는 몽골을 시작으로 캄보디아, 네팔, 르완다 등에서 사회적 기업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몽골에서 난방 축열기를, 캄보디아에서 태양광 헤드 랜턴과 솔라 홈 시스템을 생산했고, 현재는 르완다에서 커피 생두 생산과 판매를, 우간다에서 취사탄 제조와 판매를, 말라위와 베트남 등에서는 농수산물 유통업으로 시스템을 확장 중이다. 단순히 제품을 만들어 파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들이 성장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하는 데 주력한다. 굿네이버스가 ‘지원’ 대신 ‘지역 개발’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다. 그는 “지원이 일회성 도움이라면, 개발은 지역 주민이 사업의 주체로서 활동하게 함으로써 자립 역량을 갖추고 스스로 변화하도록 안내하는 것”이라며, “나아가 공동체를 변화시켜 지역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했다.



다사다난했던 학교생활, 동기들보다 늦은 졸업

지금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NGO 전문가이지만, 당초 그의 꿈은 목회자였다. 친가, 외가 합쳐서 무려 12명의 목사를 배출한 목회자 집안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다른 길을 고민하지 않았다. 하지만 격동의 현대사와 온몸으로 부딪치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삶의 방향이 달라졌다.


신학과 신입생으로 입학한 1965년, 한일 협정 반대 투쟁이 격렬했던 그때 시위에 앞장서면서 65일간 투옥됐다. 학교에서도 제적 처분을 받았다. 출소 후 해병대에 입대했다가 베트남전에 참전, 오른손 손가락을 두 개나 잃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1970년에 복학해 1974년에 졸업했다. 그가 입학 동기보다 졸업 동기들과 친분이 두터운 이유다.



“학교 다닐 때 서남동 교수님을 제일 존경했어요. 그분이 사회 참여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해 주셔서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조직을 어떻게 만들고, 이끌어 가는지에 대한 방법을 가르쳐 주신 분도 있고요. 그 외에도 정말 훌륭한 교수님들이 많았어요. 저는 그래서 늘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연대가 키운 사람’이라고.”


잠시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지하철은 물론 학교 앞 버스 정류장도 없어 신촌로터리에서 학교까지 한참 걸어와야 했지만 특유의 낭만이 있었다.”고, “그 길을 지나 백양로로 접어들 때의 편안함, 청송대에서 느낀 안정감은 지금도 생생하다.”는 말은 단순한 추억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가 학교에 느끼는 깊은 애정이 전해져 왔다. 훈장조차 거절할 정도로 수상을 고사하기로 유명한 그가 올 1월, ‘연세를 빛낸 동문상’ 수상을 수락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하며 달라진 인생의 항로

이처럼 다사다난한 학창 시절을 겪은 탓에 동기들보다 한참 늦은 졸업을 하게 된 어느 날, ‘월드비전 직원 모집 공고’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생소한 단체였지만 모집 공고의 ‘신학과 출신’이라는 문구에 끌렸고, 전국에 있는 보육원, 나환자 정착촌 등을 다니며 아이들과 만나는 일이라는 ‘특별한 임무’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렇게 아이들과 더불어 생활하며 1년 반의 시간이 흘렀고, 마침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누이의 권유로 유학을 준비했다. 이미 결혼도 했고, 한창 미국으로 떠날 준비로 바쁜 시간을 보내던 중 월드비전으로부터 경기도 성남의 복지관장직을 제안받았다. ‘유학’을 이유로 거절했지만 ‘6개월이라도 봐 달라’는 부탁에 결국 성남으로 향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당시 성남은 대표적인 도시 빈민 지역으로 가난과 굶주림이 일상인 곳이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 대신 일터로 내몰리거나, 학비와 학용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했다. 지원금을 받아 어려운 가정에 나눠 주는, 전통적인 NGO의 지원 방식으로는 한계가 명확히 보였다. 그는 부모들이 자립을 위해 직업 훈련을 받도록 했고, 아이들은 학교에 갈 수 있도록 도왔다. 그가 굿네이버스를 운영하며 지역 개발을 중시하게 된 배경이다.


국내 아동의 권리 증진에도 기여했다. 1990년대 초 아동 학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거의 없던 상황에서 국내 민간단체 최초로 아동 학대 상담 센터를 만들어 피해 아동의 보호와 치료 서비스를 시작했다. 아동 학대 예방 교육, 세미나 등을 통해 대국민 인식 개선에도 앞장섰다. 이런 노력 덕분에 2000년 아동복지법이 개정됐고, 2016년부터는 굿네이버스가 국내 최초로 개발한 ‘아동 보호 통합 지원 전문 서비스’를 바탕으로 아동의 안전과 건강한 성장을 지원하고 있다.


“성남복지관에서 6년간 일하면서 지금 굿네이버스에서 하는 활동을 모두 경험했어요. 그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도 NGO를 조직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성장시킨 밑거름이 됐습니다. 특히 지역마다 공장이나 농장 등 환경에 맞는 자립 시설을 마련해 스스로 일어서게 하는 굿네이버스의 사업 방식은 이 경험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울러 긴급 구호 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도움이 필요한 곳은 어디든 달려간다’는 굿네이버스의 핵심 가치에 따라 재해가 발생하는 현장에는 가장 먼저 달려가 도움을 전한다. 1994년 르완다 내전 때는 국내 NGO 최초로 의료진을 파견했다. 그도 이 현장에 있었다. 콜레라로 이미 50만 명이 사망하고 하루 5천 명씩 목숨을 잃는 참혹한 현장에서 굿네이버스는 간이 의료 시설을 세워 하루 200명의 생명을 구했다. 지금도 그는 그때를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는다.



유산 기부, 새로운 문화가 되기를 

요즘 그가 관심을 갖는 일은 유산 기부 운동이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드는 시대 변화에 따라 시니어 회원들을 위한 실버타운을 만들어 특별 서비스로 제공하는 한편, 유산은 전 세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기부하는 문화를 만들고자 한다. 별도 조직으로 미래재단을 출범시킨 이유다.


“기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낸다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주인이 된다는 의미가 있어요.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인생을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능동적인 자세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초창기에 회원들을 모집할 때도 당당하게 권했어요. 인생이 바뀌고, 세상이 달리 보이는 기회가 생긴다고요. 청년들에게도 이 말을 꼭 해 주고 싶어요.”


나눔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는 그의 미소가 어린아이처럼 해맑다. 평생 이타적인 삶을 살아온 그의 모습은 이 땅에 예수님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될 만큼 거룩한 성자를 떠올리게 했다.

 

vol. 635

연세소식 신청방법

아래 신청서를 작성 후 news@yonsei.ac.kr로 보내주세요
신청서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