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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Impact Makers] 자살·중독 없는 건강한 세상을 꿈꾸다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3-11-23

자살·중독 없는 건강한 세상을 꿈꾸다

사회의 아픔을 치유하는 한국자살예방협회 기선완 회장(의학 81)



2004년 출범한 한국자살예방협회는 자살을 사회 시스템의 문제로 접근해 해법을 찾고,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예방 노력을 전개하는 민간단체다. 그 중심에는 기선완 회장이 있다. 정신의학과에서도 가장 힘든 분야로 꼽히는 ‘자살·중독’을 선택, 많은 이들이 건강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는 그는 ‘사회의 아픔을 치유하는 의사’로 불린다.



자살의 또 다른 원인, 사회 문제


우리나라는 10만 명당 자살 사망자 수가 22.6명으로, OECD 국가 중 가장 많다. 그 숫자를 줄이기 위해 정부는 국무총리실 산하에 자살예방위원회를 만들고,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을 설립하는 등 다양한 예방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민간단체로는 한국자살예방협회가 대표적이다. 정신건강의학, 간호학, 심리학, 사회복지학, 신문방송학, 법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두루 참여했고, 내년이면 사단법인이 된 지 꼭 20년이 된다. 


“우리 대학교에서 만난 은사님이자 우리나라 정신의학계의 거목인 이홍식 선생님(의학 75)께서 협회 설립을 주도하셨어요. 초대 회장을 하시면서 기반을 닦느라 애를 많이 쓰셨죠. 협회 출범 이후 정부 기관들과 함께 노력하면서 한때 10만 명당 30명 이상까지 올라갔던 자살률이 2012년부터 줄기 시작했어요. 물론 아직도 OECD 국가 중 독보적인 1위이고, 요즘 다시 증가 기미가 보여 걱정스럽습니다.”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 국가의 오명을 안고 있는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무엇보다 경제 발전에 따라 나라는 잘살게 됐지만, 짧은 기간에 이뤄 낸 압축 성장의 부작용은 곳곳에서 그늘을 드리웠다. 급격한 사회 변화를 따라오지 못한 사람들이 생겨났고, 양극화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이 양산됐다. 협조와 신뢰보다는 투쟁적이고 경쟁적인 사회 분위기 역시 스트레스를 가중시켰다.

 

“그래서 자살은 ‘복합적인 사회 문제가 만든 최종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개인의 자살 징후를 알아채 개별적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거시적인 수준의 정책을 수립해 운영하면 전반적인 자살률은 줄일 수 있어요. 특히 자살의 원인과 배경을 잘 성찰하면 우리나라의 진짜 문제를 알 수 있어요. 결국 자살 문제에 관심을 두는 것은 불합리한 사회 구조를 개선하고, 나아가 국가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투철한 사명감과 봉사 정신으로 회장직 수행

코로나가 발발한 2020년 임기 2년의 한국자살예방협회장이 된 그는 그로부터 2년 후 한 번 더 협회장으로 선임되며 2024년 2월까지 연임하게 됐다. 병원에서 진료하는 임상의로서, 급여도 없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협회장직을 수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흔쾌히 협회장직을 맡았다. 지역 사회를 아우르는 정신 건강 사업이나 정신 건강 정책 전문가가 드문 현실에서 자신의 역할을 외면하지 않은 것이다. 정신과 의사가 된 후 지금까지 남들이 꺼리는 중독환자에 집중해, 그들의 일상 회복을 돕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처럼 사명감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취임 직후 코로나라는 악재를 만난 탓에 협회 운영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한국자살예방협회의 주요 수익원은 자살 예방과 관련된 교육 사업에 있다. 캐나다의 교육 기관에서 발행하는 교재를 사용하는데, 코로나 기간에도 대면 수업을 원칙으로 하는 캐나다 측의 요구 사항은 우리 정부의 방역 방침과 배치돼 진행이 어려웠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협회를 이끌며, ‘생존’시켰다. 이에 화답하듯 회원들은 만장일치로 그의 연임을 결정했다. 투철한 사명감으로 우리 사회의 자살률을 줄이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그에게 보내는 감사와 존경의 표현이기도 했다.



인생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도록 지원 


그는 인천에 자리 잡고 있는 가톨릭관동대 국제성모병원에서 일주일에 다섯 번, 토요일에도 격주로 환자들과 만난다. 제11대 한국중독정신의학회 이사장을 지내기도 한 중독 전문가인 그에게는 특히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이 많다. 알코올 중독은 대개 ‘술이 센’ 사람들이 빠지기 쉽다고 한다. 적당한 양에서 멈추는 ‘조절 음주’가 되지 않으며, 술로 인해 몸에 이상이 생기고, 술 때문에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는 일이 많으면 중독으로 판단한다.


“일단 중독 상태가 되면 치료가 되기는 하지만 굉장히 어렵습니다. 끊기는 쉬운데 유지가 어려워요. 술에 중독된 사람은 술 외에는 다른 취미도 없고, 술 먹는 게 유일한 낙이죠. 술을 마셔야 잠이 오고, 가족들과 대화하려고 해도 일단 술부터 마셔야 하는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단순히 술을 안 먹는 것이 아니라 생활 습관 자체를 바꿔야 합니다. 스스로 조절 음주가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새롭게 단주 생활을 하는 것을 ‘회복’이라고 해요. 술을 끊고 인생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면서 회복의 길로 가야 하는데, 그게 정말 어렵습니다.”



파급 효과 크다는 점에서 좋은 정책 마련 중요 

입원 치료가 끝나고 외래 진료로 돌리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환자들을 위한 단주 모임을 만들었다. 술이 없는 새로운 일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매주 한 번씩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힘을 북돋우는 일종의 ‘자조 모임’이었다. 국제성모병원으로 옮기기 전, 건양대병원에 10년간 재직하며 운영한 그 모임을 통해 많은 회원들이 삶의 의미를 되찾았다. 그들과 그 가족들이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일은 지금도 가장 큰 보람이다. 


“중독에 빠진 분들은 실은 굉장히 외롭습니다. 술을 많이 먹는 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알코올중독자로 살아오면서 힘들었던 부분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죠. 그런 공감과 이해를 받고, 단주하면서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보게 되면, 자발적으로 열심히 와요. 나와서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 시간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자조 모임은 그래서 중요하고, 무척 효과적인 치료법이에요.”


그는 지역 사회 정신 건강 사업에도 많이 참여한다. 보건복지부 자문 기관인 중앙정신복지보건사업지원단장도 맡고 있다. 모두가 맡지 않으려고 하는, 중증 정신 장애인 정책을 만드는 데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낸다. 그 과정에서 정부에 쓴소리를 해야 할 때도 많다. 


“힘들죠. 그래도 그만큼 보람이 있어요. 병원에서 환자를 열심히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 정책을 잘 만들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무척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중독환자들의 재활 성공이 가장 큰 보람


의사로서 탄탄대로 대신 이처럼 험난한 길을 걷고 있는 데는 학창 시절 스승의 영향이 컸다. ‘전인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도울 수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해 정신의학과에 매력을 느꼈고, 당시 새로 부임한 이호영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이호영 선생님은 미국에서 활동하다 오신 분인데, 저희 학년(81학번)부터 강의를 들었어요. 수업을 정말 재미있게 하셔서, 저뿐만 아니라 그분의 영향으로 정신과를 택한 학생이 많았어요. 환자에 대한 이해를 비롯해 포괄적인 치료법 등에 대해 많이 가르쳐 주셨고, 지역 사회 정신 건강 사업에도 관심이 많으셨죠. 제게는 롤 모델 같은 분이에요. 지금 제가 하는 일들이, 그때 선생님께서 일러 주셨던 방향인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해요.”


우리 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인턴·레지던트를 마친 후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경기도 오산의 정신과 전문 병원이었다. 알코올 의존증 환자가 많은 그곳에서의 경험 역시 자연스럽게 그를 중독 전문가의 길로 이끌었다. 


경험이 많지 않은 의사로서 매일 알코올 의존증 환자를 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왕이면 제대로 해 보자는 마음으로 수백 명의 환자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강의를 하기도 했고,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이들의 재활과 회복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건양대병원 개원과 함께 자리를 옮긴 후에도 그는 알코올 의존증 환자 치료에 주력했다. 건양대병원을 떠나 국제성모병원으로 옮긴 지 이미 10년이 지났지만, 당시 그가 만든 자조 모임은 지금도 후배 의사들이 이어받아 활발히 운영 중이다. 


“알코올 중독은 한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살처럼 사회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가정 폭력, 음주 운전 같은 범죄로 발전할 수 있고, 배우자의 우울증은 물론 자녀들의 성장 발달에도 영향을 미쳐요. 그래서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와 함께 이들을 재활시켜 사회의 생산적인 일원이 되게 하는 의료 시스템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정신 건강 인프라 확대 절실  

정신 질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과 정신과 문턱을 낮추는 일도 여기에 포함된다. 대한민국 성인의 정신 장애 평생 유병률은 27%가 넘는다. 4명 중 한 명은 살면서 한 번쯤 정신과적 문제를 경험할 정도로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상 징후를 느끼면 편안하게 정신과 병원을 찾아 치료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다. 


“조현병 환자조차도 빨리 발견해서 빨리 치료하면 예후가 훨씬 좋아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발병 후 너무 늦게 병원을 찾는 게 문제입니다. ‘조기 발견·조기 치료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고, 이들이 입원 치료할 때의 인권 보장에 대한 논의도 이뤄져야 합니다. 입원만으로 치료가 끝난 게 아니기 때문에 사후 사례 및 투약 관리를 비롯해 복지 지원, 교육까지 포괄적인 시스템이 필요해요.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에 비해 이런 정신 건강 인프라가 무척 부족합니다. OECD 국가에서 국민 건강을 위해 지출하는 비용의 약 5%가 정신 건강 분야에 쓰이는데, 우리나라는 그 절반 수준밖에 안 돼요. 두 배 이상 늘려야 합니다.”



학창 시절부터 품었던, 사회적 약자와 지역 사회에 대한 관심


의과대학 81학번인 그는 최루탄과 함께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1987년 인턴으로 일할 때는 민주화 운동 당시 희생된 고 이한열 열사를 중환자실에서 전담하기도 했다. 열심히 돌봤지만 결국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며 허탈한 마음으로 병원을 나서던 그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의청’이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의료 봉사도 열심히 다녔다. 지금의 목동 아파트 자리, 판자촌이 있던 마을을 동아리 회원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았다. 주민들과 친해져 나중에는 함께 축구 시합을 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사회적 약자들과 지역 사회 건강에 대한 관심은 이미 이때부터 싹트고 있던 셈이다.

 

“레지던트 4년 차 때,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시던 서창삼 선배님이 일종의 기부 형태로 미국 정신의학회에 후배를 초청한 적이 있어요. 운 좋게 제가 뽑혀서 다녀왔죠. 학회 경험도 좋았지만, 미국에서 지역 사회 중독환자를 치료하던 선배님을 보며 배운 게 많았어요. 이후로도 미국 학회에 갈 때마다 뵙고, 좋은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습니다. 학창 시절, 이호영 선생님과 서창삼 선배님을 만난 것을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대학교에 입학하며 막연히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구체적인 목표를 향해 달리기보다는 그저 현재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렇게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어느새 정신 건강 및 중증 정신 장애인에 대한 정책, 자살 예방, 중독 등의 분야에서 남들보다 열심히 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약자를 돕겠다는 마음을 늘 간직하고 실천하며, 연세의 건학 이념대로 살고 있다’는 기선완 회장. 시종 여유 있는 웃음과 편안한 표정이 인상적이었던 그는 후배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조언을 남겼다.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이 있죠. 청년들이 ‘힘들다’고 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얘기 중 하나일 겁니다. 그런데 이 말 듣지 마세요. 자신이 감당 가능한 어려움은 도전 과제로 생각하고 열심히 하되, 감당하기 어렵고 마음에 큰 상처가 되는 어려움은 피해야 합니다. 도망가세요. 그래야 건강한 마음으로 살 수 있어요.”

 

vol. 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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