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가슴에 사랑과 봉사 심어 119년 동안 언더우드 일가가 한국의 교육·종교·사회 발전에 대한 기여는 한국 근대사에 길이 보존될 수 있는 기념비적인 것들이다. 언더우드 일가는 4대에 걸쳐 한국인보다 더한 한국사랑을 실천하며 한국의 발전에 앞장 서 왔고, 조선기독교대학을 설립하여 한국 최고의 명문 사학인 오늘날의 연세대학교를 일구어냈다. 한국을 사랑해서 한국인이 된 우리의 영원한 친구 언더우드家! 그들의 고귀한 뜻과 정신은 우리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원두우 박사-한국 근대 교육과 선교의 초석 원두우 박사(H.G. Underwood)는 미국인 선교사·교육자로 한국에 건너와 평생을 한국을 위해 일했다. 그는 1859년 존 언더우드의 4남으로 런던에서 출생하였고 1881년 뉴욕대학교를, 1884년 뉴브런즈윅 신학교를 졸업한 뒤 해외 선교에 뜻을 두고 선교지를 모색하던 중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는 약혼녀에게 한국 선교를 제안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파혼을 선언하고 언더우드는 홀로 한국을 찾았다. 한국과의 질긴 인연이 시작된 그때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주일로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는 세브란스의 전신인 광혜원에서 물리·화학을 가르쳤으며, 1886년 고아원을 겸한 학교를 설립하는데 이는 경신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1887년 벽지전도부터 시작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조직 교회인 서울 새문안교회를 설립했고, 1889년에는 기독교서회(基督敎書會)를 창설하였으며, 1900년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기도 했다.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해 성서의 번역사업을 주관하는 한편, 1890년에 <한영사전> <영한사전>을 출판하고, 1897년에는 주간지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하기도 했다. 연희전문학교 설립, 한국 근대교육의 기초 마련 언더우드가 한국에서 이룬 많은 사역들 중 교육의 근대화에 끼친 영향은 한국 근대교육의 초석을 놓았다는 데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교육이 국가의 백년대계라고 한다면 언더우드야말로 그가 선교하던 시대로부터 100년후인 오늘 한국 근대화의 근간을 이룬 공로자라고 말해야 마땅하다. 1915년 3월 조선기독교대학(Chosen Christian College)을 시작해 연희전문학교로 발전시켰다. 그는 1916년 10월 신병으로 영면할 때까지 한국 개화기에 종교·정치·교육·문화 등 여러 분야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119년전 그가 뿌린 씨앗은 이제 수만배의 결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결실은 하나님의 기적이라 부를 만하며, 이 기초를 원두우 박사가 놓은 것이다. 원한경 박사-언더우드의 뜻을 이은 근대교육자 원한경 박사(H.H.Underdwood)는 부친이 생명을 바쳐 일궈놓은 교육기관을 더욱 발전시켜 우리대학교를 한국의 대표적인 고등사학기관으로 발전시켰다. 원한경 박사는 1890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모교인 뉴욕대학을 마치고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아 경신학교 교사를 역임하고 제3대 연희전문학교 교장이 되기도 했으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는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인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는 한국 최초로 사회학 강의를 개설하고 1934년 연희전문학교 내에 한경관을 건립하였으며 3.1운동, 제암리 사건을 알리는 등 일제의 만행을 온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이후 아버지 언더우드가 못다 이룬 한국사랑을 실천해 가면서 살다 1951년 과로로 별세하였다. 원일한 박사-영원한 한국인 원한경 박사는 4남 1녀를 두었는데, 이 중 장남이 원일한 박사(H.G. Underwood)이다. 1917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뉴욕 해밀턴대학과 뉴욕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한 기간을 빼고는 생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살며, 우리나라 교육 발전과 한·미 우호 증진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1939년 미 북장로회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내한하여 1941년 결혼 후, 연희대학에 재직하다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한 후 1947년 복직하는 등 한국역사와 아픔을 함께 하였다. 한국전쟁 시에는 미해병사단 정보부에서 한국을 도왔으며 휴전협정 때는 UN군측 수석통역관을 맡기도 했다. 1951년 휴전과 함께 전역 후, 연희대학 문과대 조교수(교육학)로 취임하여 이후 우리학교 총장서리, 재단법인 이사 및 상임이사를 역임하며 우리대학교가 오늘날의 규모로 발전할 수 있게 기초를 닦는 등 연세 역사에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다. "내 몸 속에는 한국의 피가 흐른다"는 말을 즐겨하며 한국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실천했던 원일한 박사는 제2의 고국인 한국에서 지난 1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연세대 한 끝없는 사랑을 후대에 남겼다. 원한광 박사-끝없는 연세사랑의 약속 원일한 박사의 장남인 원한광 박사(H.H. Underwood)는 원일한 박사가 강제 출국되어 미국에 머물던 1943년 미국에서 출생했으며, 세살 때 한국으로 건너왔다. 미국 해밀턴 대학을 졸업하고 1972년 미국 뉴욕 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우리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1987년 초대 국제학대학원 교학과장을 역임했고 이후 국제교육부장과 국제학대학원장을 거쳐 현재 재단이사로 재임 중이며, 한미교육위원단 단장을 역임했다. 최근 원한광 박사는 머지않아 주거지를 미국으로 옮길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가 이런 결정을 한 것은 이제 선조들의 꿈이 이루어지고 한세기가 넘는 언더우드 가문의 한국사랑이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한광 박사는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좋게 생각하는 외국인이 한국에 있는 것도 필요하지만, 사실 한국에 대해서 잘 아는 미국사람이 미국에서 더 필요하다. 미국에 가서도 한국과 연세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며 끊임없는 한국사랑을 약속하기도 했다. 언더우드家 여성들의 한국사랑 언더우드가의 선교와 봉사에 있어 여성들의 역할도 간과할 수 없다. 언더우드 가문의 여성들은 의사, 교사, 교수로서 자신들의 일생을 한국에 바쳤다. 언더우드 1세의 부인 릴리아스 호튼 박사는 조선을 찾은 첫 서양 여의사로 명성황후의 전담 의사로 활동하는 등 숨질 때까지 한국에서 의료활동을 했다. 백두산 정상에도 오를 정도로 한국의 산을 사랑했고 부인회를 조직해 여성계몽에 앞장섰던 2세의 부인 에델 반 와그너 여사는 1949년 좌익들에 의해 사택(현재 언더우드가기념관)에서 피살됐다. 또 3세의 부인은 최초의 영한사전을 만들었으며, 4세의 부인은 우리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강의를 하고 한국학 서적을 영역해 해외에 알리는 데도 앞장섰다. 이처럼 언더우드가의 여성들 또한 진정한 봉사자이며 숨은 개척자였다. 언더우드 기념사업 우리대학교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선교정신과 학교 창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언더우드선교상 시상, 언더우드기념강좌 개최, 언더우드 석좌교수제 추진 등 각종 언더우드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03년 10월에는 언더우드가의 옛 연희동 사택에 언더우드가 기념관을 새롭게 단장하여 문을 열었다. 이 기념관에는 언더우드 4세인 원한광 박사로부터 기증받은 많은 사료들을 기반으로 언더우드 문헌자료실을 마련할 계획이며, 문헌자료실이 완성되면 기존의 전시실과 함께 명실상부한 언더우드가 기념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나아가 언더우드 국제학부(Underwood International College)를 설립해 2006년 3월 개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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