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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원주시 장애인종합복지관 서미혜 관장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04-10-01

헌신적인 한국사랑 40년, 장애인들의 천사 “장애인들도 살기 좋은 사회를 위하여” 40년간 모국인 캐나다를 떠나 또 하나의 모국인 한국을 품에 안은 서미혜 관장. 서 관장은 1960년 캐나다 연합교회에서 한국으로 파송된 이래로 간호학의 발전과 이 땅의 아픈 이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1987년부터는 우리대학교 간호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많은 제자를 양성하는 한편, 가정간호제도를 정착시키는데 큰 몫을 했으며, 강원도 원주시에 장애인종합복지관을 설립하는 데에도 주도적 역할을 해냈다. 특히, 지극한 사랑으로 장애인들을 돌보고, 평생 결혼도 하지 않은 체 두딸을 입양해 훌륭하게 키워낸 그녀의 모습에서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서미혜 관장이야말로 이 각박한 시대에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 아닐까. 오늘도 두 팔을 뻗어 장애인들을 그 따뜻한 품에 안는 한국의 나이팅게일, 우리의 마더테레사 서미혜 관장(원주시 장애인종합복지관)을 만났다. * 언제 어떻게 처음 한국에 오게되셨습니까? 1960년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한국신학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전산초 박사님의 제안으로 1961년 가을부터 연세대 간호대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간호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됐고, 그래서 다시 캐나다로 돌아가 간호학을 공부한 후 1966년 다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한국으로 돌아 온 후 1967년부터 74년까지는 전남 광주기독병원에서 일했습니다. 주로 보건간호를 했는데 결핵환자를 교육하고 치료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는 동시에 연세대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 언제부터 강원도 원주에서 봉사를 시작하셨습니까? 1974년 원주 기독병원에 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가정간호라는 개념도 의료보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난한 사람들은 퇴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소를 팔고 심지어 집까지 팔아야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너무 안타까웠죠. 환자들을 빨리 퇴원시켜 경제적 부담을 줄여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한 끝에 가정간호를 시작했습니다. * 원주 지역에서 봉사를 하신 지 무려 30년이 되셨습니다. 예, 올해로 정확히 30년이 되었습니다. 원주에 처음 왔을 당시에는 원주 전지역을 통틀어 신호등 1개, 포장도로도 1개 밖에 없었고, 고속도로도 서울서 원주까지 밖에 안 뚫렸었습니다. 30년 동안 이렇게 도시 모습이 변했을 뿐 아니라 여러모로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습니다. 제가 원주에 처음 왔을 당시만 해도 원주 전체에 4년제 간호대학을 나온 인력이 몇 안될 정도였습니다. 이제는 우리대학교 간호학과를 통해 전문인력 양성 여건이 많이 좋아졌고, 이를 통해 전반적인 의료의 질도 높아졌습니다. 또 96년 가정간호가 의료보험 대상이 되면서 가정간호의 수요도 점증하고 있으며 서비스의 질 또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 외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힘들지는 않으셨는지요. 전라남도 광주에서 있을 때는 사람들 눈에 제가 퍽 신기했나봅니다. 길을 걸으면 아이들이 “헬로, 오케이? 헬로, 오케이?”를 외치며 쫓아다니기도 하고, 멈춰 서있으면 아이들이 몰려들어 빙 둘러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원주에서는 외국 군인들을 많이 봐서 그런지 별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환자의 집을 방문했을 때 저를 한국사람들보다도 더 신뢰해줬던 것 같습니다. * 40여년 동안이나 한국에서 환자들을 돌보셨으니, 기억에 남는 사람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는 사람은 참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1974년 한 나병환자가 맹장이 터져 수술을 하기 위해 입원했었습니다. 저러다가 이 환자가 죽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 환자는 돈이 없어서 퇴원을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사회에서 쫓아낸 사람, 가족들에게서도 외면당한 사람이었죠. 그래서 1974년부터 91년까지 매주 그 나병환자의 가정을 방문해 치료를 했습니다. 그 사람을 계기로 나병환자들도 많이 만나게 됐기 때문에 기억에 남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나병환자인 아버지와 살고 있는 8살짜리 한 뇌성마비어린이입니다. 학교 갈 나이가 되었는데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 어린이도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원주에는 장애인을 위한 학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몇몇 장애인학교를 찾아다녔죠. 한 기관에서는 아이의 지능 수준이 낮아 받아 줄 수 없다, 또 어떤 기관에서는 기숙사와 학교사이를 걸어 다닐 수 없어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결국은 그 아이를 위해 한 선생님의 집에서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사람 한사람 장애어린이들이 모이게 되었고, 아이들이 많아져 집에서 교육을 하기에는 역부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981년 원주기독병원에 제안을 해 병원내에 장애어린이를 교육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20여명의 장애어린이들에게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 그렇게 시작하신 장애인 교육이 현재의 원주시 장애인종합복지관으로까지 발전했군요. 장애인종합복지관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10월 1일 우리 원주시 장애인종합복지관이 1주년을 맞습니다. 우리 장애인종합복지관은 장애인에 대한 종합적인 관리와 복지를 위해 2003년 원주시와 연세대 원주기독병원의 지원으로 설립됐습니다. 우리 복지관은 원주시에 있는 유일한 장애인복지관이며, 상담지원팀, 정보화지원팀, 사회적응과 자립생활을 돕는 사회재활팀, 물리 작업 심리 언어치료 등을 하는 의료재활팀, 훈련을 통해 취직 할 수 있도록 돕는 직업재활팀, 장애아동에게 주간보호서비스를 제공함으로서 부모의 부담을 덜어주는 주간보호소, 보호작업장, 수치료실 등을 갖춘 750여평의 규모의 시설입니다. * 가족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두딸이 있습니다. 30여년전 홀트재단을 통해 아이들을 입양했죠. 그 아이들이 성장해 지금 한 명은 결혼해 아이도 낳고 미국에서 살고 있고, 또 한 명은 캐나다에 있는데 아직 결혼은 안 했습니다. * 어떻게 입양을 하게 되셨습니까? 67년부터 74년까지 광주 기독병원에서 일을 할 당시에, 길에서 떠돌고 있는 6살짜리 아이 한 명을 집에 데려온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다가 시청에 데려갔더니 그 아이를 시립 갱생원이라는 곳으로 보내더군요. 얼마 후 갱생원에 찾아가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환경이 안 좋은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 아이가 좁은 방안에 정신질환자들과 함께 있더군요. 6살밖에 안된 어린 아이인데 말입니다. 안되겠다 싶어 그 아이를 다시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아이의 어머니가 나타나 아이를 데려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다시 집을 나갔다는데 그 후론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부모가 나타나 아이를 데려가는 일을 겪고 나니 입양을 하려면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홀트재단을 통해 입양을 하게 된 거죠. *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최근 원주시민의 날 행사를 했는데 “살기 좋은 원주”라는 타이틀로 비디오를 상영했습니다. 영상 중에 일반인과 노인들이 등장해 원주가 참 살기 좋은 곳이라고 말하더군요. 제 바램이 있다면 이제 “장애인들도 살기 좋은 원주”가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키가 큰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고, 동양사람도 있고 서양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장애인도 좀 다른 특징을 가진 사람일뿐입니다. 너무 다르게 생각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장애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같이 즐기는 것, 함께 일하는 것, 일상적인 것들이지만 일반인들과 어우러지는 것이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인들과 장애인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vol.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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