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의 차가움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조나단 글래이저, 2023)>
국어국문학과 백문임 교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꼭 사운드 설비가 좋은 곳에서 봐야 한다.”, “연세대학교에 계시니 가까운 *** 시네마에서 보시길 권한다.”는 충고를 듣고 연희동으로 발길을 옮긴 것은, ‘제2회 전쟁과 여성 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빵과 대지를 위해(Of Land and Bread, 이합 타라비에, 2019)>가 상영되던 올해 6월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연구실에서 출발해 연희동에 들렀다가 홍대입구의 영화제 현장에 가면 마침 시간도, 동선도 잘 맞는구나, 라고 기꺼워하며 약간의 콧노래도 흥얼거렸던 것 같다. 그날 내가 보게 될 두 편의 영화가 어떤 여파를 남길지 모른 채 순진하게도.
홀로코스트 영화로서 깐느 및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팔레스타인 시민들이 직접 촬영한 <빵과 대지를 위해>를 같은 날에 연달아 접한 대가는 혹독해서, 나는 탈진한 채 저녁 일정을 포기하고 귀가해야만 했다.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한나 아렌트)을 구현해 낸 영화는 구토를 유발할 정도로 완벽했고, 카메라가 혁명의 도구가 아니라 방어의 수단이 되는 것을 보여준 아카이브 영상은 너무나 처절했다.
“균형을 맞췄다고 생각해라.” 정치적, 미학적으로 얼핏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두 영화를 같은 날 본 나에게 친구들이 위로삼아 건넨 말이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홀로코스트 영화를 이제는 더 보고 싶지 않다.”
수십 년 동안 비판적인 철학-미학-문화이론의 근간을 형성했던 홀로코스트에 대한 최근의 복잡한 심경을 주변 동료들은 이렇게 표현한다. 하지만 나는 <빵과 대지를 위해>와 더불어 <존 오브 인터레스트>도 강력히 권한다. 전자가 폭력의 현장에 우리를 잡아끄는 힘으로 질식과 비명과 흐느낌을 불러낸다면, 후자는 수십 년간 고발과 증언이 축적된 후 불현듯 엄습하는 차가운 끔찍함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빵과 대지를 위해>에서 카메라를 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일상이 어떻게든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만큼이나,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며 우리의 진부한 일상이 무엇과 담을 마주하고 있는가를 둘러보게 되는 것도 강렬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실화에 바탕한 것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인 루돌프 회스 중령이 수용소와 담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지은 그림같은 사택에서 아내 헤드비히 및 다섯 명의 아이들과 안온한 일상을 누리는 것을 그린다. 유대인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던 어머니와 달리, 이제 유대인이 남긴 사치품과 화장품을 자기 것으로 향유할 수 있게 된 헤드비히에게 이 일상은 “17살부터 꿈꿔왔던 삶”이다. 담 너머에서는 매일 아우슈비츠의 붉은 연기가 솟아오르지만 그녀는 꽃과 나무 외에는 시선에 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더 빠른 시간에 더 많은 유대인을 소각할 시스템을 고안하는 데 여념없는 회스 중령은 그저 새와 말 등 동물을 사랑하는 워커홀릭 가장처럼 보인다. 이 작은 유토피아인 소장 사택과 그 담 너머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학살이 주는 위화감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타자의 고통에 대해 감각을 무디게 하면서 하루하루를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매우 오랫동안, 끈질기게 들러붙을 영화다. 담장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지 않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감독도 공을 들였듯 그것을 듣지 않고, 냄새 맡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이 집에 방문했던 헤드비히의 어머니는 소각장의 붉은 화염과 냄새에 화들짝 놀라고, 아들은 담을 넘어 들려오는 죽음의 소리들(예컨대 “강에 처넣어”라고 명령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을 다 알아듣고 흉내 내고 있다. 딸의 몽유병은 이 폭력이 각인된 일상에 대한 가장 무의식적이고 적극적인 저항(“설탕 나눠줘요”)처럼 보인다. 수용소와 사택을 오가며 전혀 분열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 회스 중령조차도, 불현듯 찾아오는 구토에 어리둥절하지 않은가. 단란한 가족 물놀이가 소각장의 오물로 인해 언제든 중단될 수 있듯이, 우리의 ‘일상’이 실은 엄청난 폭력 위에 매일 힘들여 세우는 놀이동산이라는 것. 그것을 감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흔한 홀로코스트 ‘장르 영화’들을 압도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만약 이 영화를 두 번째 보게 된다면, 천국 같은 사택과 소각장의 연기, 그리고 모두가 지적하는 놀라운 사운드 외에도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올 수 있다. 바로 ‘존 오브 인터레스트(이익 구역),’ 즉 홀로코스트를 계기로 많은 것을 공짜로 취득한 구조의 문제다. 유대인이 남긴 물건들(모피코트와 다이아몬드 같은 사치품부터 원피스, 커튼 등 일상품까지)을 나눠갖고, 유대인이 남긴 신체 일부(이빨)를 장난감으로 삼는 수용소 관리자 가족들, 그리고 영화에서 내내 묵묵히 미장센을 채우던 ‘노동력’으로서의 유대인. 어쩌면 홀로코스트의 본질은 유대인을 ‘절멸(소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착취’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물질적 순환구조가 보이게 된다. 그러니 아무리 효율적인 소각 시스템을 고안한다 해도 회스 일가의 삶 자체는 지속적인 착취를 필요로 했던 것이고, 그것은 불가피하게 ‘접촉’을 낳는다. 회스 중령의 결벽증과 헤드비히의 히스테리는 이 ‘접촉’에 대한 면역반응처럼 보인다.
덧붙여, 조나단 글래이저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떨리는 손으로 종이에 들고 읽은 수상소감을 옮긴다. 이 감독은 영국 국적의 유대인으로서, <언더 더 스킨(2014)>으로 널리 알려졌다.
“우리의 모든 선택은 현재를 반성하고 직면하기 위해서, 즉 ‘그때 그들이 한 일을 보라.’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보라.’고 말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 영화는 비인간화가 최악에 이르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만들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다움과 홀로코스트가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갈등을 야기하는 점령에 이용되는 데 반대하는 사람들로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10월 7일 이스라엘의 희생자든, 지금도 진행 중인 가자 지구 공격의 희생자든, 이 비인간화의 모든 희생자들...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2023)
감독: 조나단 글래이저
출연: 산드라 휠러, 크리스트안 프리에델
수상: 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음향상, 국제장편영화상), 77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작품상(영국), 음향상, 외국어영화상), 44회 런던 비평가 협회상(작품상, 감독상, 기술공헌상), 58회 전미 비평가 협회상(감독상), 35회 팜스프링스 국제영화제(국제비평가협회 각본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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