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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인문학 산책] 우리는 왜 문학을 읽는가?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4-08-20

우리는 왜 문학을 읽는가?

국어국문학과 조강석 교수



빠르고 정확하고 명료한 삶을 사는 데 있어 그다지 효용이 있어 보이지 않는 문학을 우리는 왜 읽는가? 실익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실익을 계량하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토마스 만(Thomas Mann)은 중편소설 『토니오 크뢰거』에서 시민과 근대 예술가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뇌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예술가는 때론 “길을 잘못 든 시민”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아마도 이와 관련해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경건하고 평온한 눈빛을 지닌 시민들과 달리 예술가는 “사물이 복잡해지고 슬퍼지는 데까지” 들여다보는, 그렇게 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주인공이 독백하는 장면일 것이다. 굳건히 자리잡아가는 근대 사회 체제 속에서 사태가 복잡해지고 슬퍼지는 데까지 굳이 들여다보는 눈빛은 나태하거나 별스럽고 때론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최단거리의 발전도상에 걸리적거리는 이물질로 치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문학과 예술의 효용은 경제적 발전도상을 성화(聖化)할 때 극대화되고 개인의 여기(餘技)에 머묾으로써 최소화된다. 그러나 실상 문학과 예술을 성화의 도구나 여기에 한정하는 것은 과대적합과 과소적합을 오가며 모두의 삶을 협소화하는 것은 아닐까? 여기 감각의 역치 값을 재조정함으로써 복안성(複眼性)의 의미를 되묻는 사례가 하나 있다. 


아아, 나는 작가의-만약에 내가 작가라면-사명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타락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마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극장에, 이 거리에, 저 자동차에, 저 텔레비전에, 이 내 아내에, 이 내 아들놈에, 이 안락에, 이 무사에, 이 타협에, 이 체념에 마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마비되어 있지 않다는 자신에 마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중략)


그러다가 며칠 후에 다시 이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을 들게 한 것이 역시 마루의 난로 위에 놓인 주전자의 조용한 물 끓는 소리다. 조용히 끓고 있다. 갓난아기의 숨소리보다도 약한 이 노랫소리가 「대통령 각하」와 「25시」의 거수(巨獸) 같은 현대의 제악(諸惡)을 거꾸러뜨릴 수 있다고 장담하기도 힘들지만, 못 거꾸러뜨린다고 장담하기도 힘들다. 나는 그것을 「25시」를 보는 관중들의 조용한 반응에서 감득할 수 있었다.


-김수영의 산문 「삼동유감」 중에서



사물이 복잡하고 슬퍼지는 데까지 들여다보는 눈과 “주전자의 조용한 물 끓는 소리”를 듣는 귀가 다를 리가 없다. 이 감각은 문학의 신체 혹은 예술의 신체라고 부를 법한 몸의 감각이며 여기서 문학은 감각의 역치 값을 재조정하는 기관으로 기능한다. 


시인 김수영은 결백한 주체가 타락한 세계를 타기함으로써 현실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한’ 부류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세계가 타락했으면, 누구도 그 바깥의 존재자일 수 없는 우리 스스로도 그 타락에 연동되어 있음을 간파했다. 따라서 결백한 주체가 타락한 세계를 타기하는 방식으로 사회와 역사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을, 자신의 감각과 사유를 끊임없이 “배신”함으로써 여기에 ‘걸린’ 세계를 동시에 거듭 갱신해가는 것이 중요함을 그는 여러 계기를 통해 시와 산문에서 주장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위의 산문에 담긴 질문을 정돈해보자. 어떻게 “갓난아기의 숨소리보다도 약한” “주전자의 조용한 물 끓는 소리”가 “거수(巨獸) 같은 현대의 제악(諸惡)을 거꾸러뜨릴 수 있다고 장담하기도 힘들지만, 못 거꾸러뜨린다고 장담하기도”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조금 우회해보자.


들뢰즈 등의 논의를 통해 다시 주목받고 있는, 동물학자이자 비교심리학자 야콥 폰 윅스퀼(Jakob von Uexküll)은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보이지 않는 그림책』에서 진드기, 짚신벌레 등과 같은 개체들이 각각이 처한 “환경세계(Umwelt)”에서 자신의 생존에 적합한 지각 표상을 형성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를 도움 삼아 말해보자면, 인간 역시 고유의 환경세계에 대처하는 지각 표상을 형성한다. 감각의 역치 값은 이 지각 표상의 최대와 최소의 경계를 구획한다. 베르그송(Henri Bergson)과 같은 철학자들이 설명한 대로 지각이, 지각 표상이 일종의 이미지라면 인간 역시 감각의 역치 값을 조정하며 세계상(world picture)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크고 높은 소리와 화려하고 눈부신 빛에 조율된 감각의 역치 값이 형성하는 세계상과, 주전자의 조용한 물 끓는 소리에 귀기울이고 반딧불의 불빛을 지각하거나 조용히 ‘별을 헤는’ 감각의 역치 값이 형성하는 세계상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언급처럼 우리가 상상하는 방식 속에 근본적으로 우리의 정치하는 방식을 위한 조건이 놓여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조르주 디디-위베르만 Georges Didi-Huberman 저, 김홍기 옮김, 『반딧불의 잔존-이미지의 정치학』, 길, 2012, 60쪽 참조) 



다시 서두에서 언급한 토니오 크뢰거를 상기해보자. 사태가 복잡해지고 슬퍼지는 데까지 들여다보는 시선의 복안성은 그 자체로 조정된 역치 값과 세계상을 형성한다. 복안성은 근대 세계의 허들이 아니라 세계를 몇 겹으로, 몇 배로 확장하는 언어적 존재 고유의 유적 특질이다. 이때 문학은 인간의 유망한 생존 도구인 언어를 통해 감각의 역치 값을 조정하는 기관이다. 그리고 감각의 역치 값을 조정함으로써 세계를 몇 겹으로 몇 배로 확장하는 것은 몇 배로 살기 위한 예비작업이다. 문학은 몇 겹의 새로운 삶으로 난 오래된 길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그러나 주전자의 조용한 물 끓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본 것이 언제일까.) 


김수영의 질문에 그 스스로 답하게 하며 글을 맺어보자. 시인 김수영은 이미지-사유에 능했다. 그는 작은 몸피 내부로부터 부풀어 터져 나올 하나씩의 세계를 ‘씨앗’ 이미지로 즐겨 표현한 바 있다. 김수영의 절창 「사랑의 변주곡」의 한 대목을 옮겨 결론을 갈음한다. 


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美大陸)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瞑想)이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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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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