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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여기 연세인] 인생의 화폭에 펼쳐 내는 ‘다시, 청춘’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3-01-25

인생의 화폭에 펼쳐 내는 ‘다시, 청춘’

동양화가로 제2의 인생을 펼치는 안창수 화백(경제학 65) 

 


인생 2막, 동양화의 거장이 되다 

수십 년의 시간을 한자리에서 치열하게 보낸 후 은퇴를 맞는 시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일선에서 물러나 은퇴 후의 유유자적한 시간을 꿈꾼다. 삶의 또 다른 시작에 대한 설렘보다는 여정의 엔딩을 준비하는 안정적인 마무리의 시간을 갖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인생 2막, 새로운 열정으로 다시 청춘시대를 맞이하는 이들도 있다. 안창수 동문이 그중 한 명이다. 30년간 금융인으로서의 삶을 마치고 은퇴해 이순(耳順)의 나이에 동양화를 시작했다. 독창적인 작품 세계로 세계적인 동양화가로 인정받고 있는 그는 나이에 상관없이 매 순간, 멈추지 않고 빛나는 열정의 시간을 창조한다. 바로 지금, 인생의 화폭을 가장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붓질, 다채로운 색감으로 채워 나가고 있다.

 


은퇴 후 만난 동양화의 세계, 나이 60에 떠난 유학길 

“수출입은행에서 전 세계 국가들의 경제 환경을 분석하고, 국제 협력, 공적 개발 원조 분야 등에서 일하며 30년을 금융 분야에 몸담았어요. 만 58세로 정년퇴임 후에는 대우조선해양의 고문을 역임하며 제 뿌리가 있는 양산으로 귀향했습니다. 귀향 후에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은퇴 후 소소한 즐거움을 찾았죠. 그러다 제 인생을 변화시킨 죽마고우를 만나게 됐어요. 바로 동양화입니다.” 


그가 동양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어린 시절부터 취미였거나 흥미를 가져 왔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스스로 예술에 대한 취미가 남달랐다고 느낀 적은 없다.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는 전혀 꿈꿔 본 적도 없었고 그의 숨겨진 재능을 인지한 적도 없었다. 뛰어난 수재로 인정받으며 명문고를 거쳐 연세에 입학했고 대학 시절 별다른 동아리 활동도 없이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가는 착실하고 고지식한 학생이었다. 


그런 그가 은퇴 후에 ‘동양화’를 만나게 된 것은 다소 무료하기도 했던 일상에서 소일거리를 찾다가 불교 경전과 사서삼경을 탐독하면서 지인의 권유로 서예를 배워 경전을 베껴 쓰기 시작하면서다. 서예를 배운 지 6개월쯤 흘렀을 때, 우연히 부산에서 열린 ‘닭 그림 전시회’를 본 후, 마침 닭의 해를 맞아 재미로 그려본 닭 그림에 주변의 호응이 좋았다. 그림을 그려 달라는 요청도 줄지었다. 이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에 그 스스로 자신이 그림에 재능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림을 배워 보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그의 나이 만 60세, 2005년 그렇게 그는 동양화의 화폭 속으로,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정말 제게 재능이 있을까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소질이 있다면 인정받아 제대로 그림을 배워 그려 보고 싶었어요. 이왕 동양화를 공부하려면 중국에서 역사가 긴 항저우 중국미술대학이 최고라 추천받았죠. 혈혈단신으로 가방 하나 메고 중국 현지 미술학교를 찾았습니다. 무작정 교수들을 찾아가 부딪혔어요. 그때 한 교수가 제 그림을 보고 추천서를 써 외국인 연구생 자격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마음이 조급했어요. 실력을 쌓기 위해 매일 기숙사와 학교만 오가며 엄지손가락이 뒤로 젖혀지지 않을 정도로 밤늦게까지 그림을 그리는 데 매진했지요. 남들처럼 어린 시절부터 차근차근 이 길을 밟아 온 것이 아니니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어요.” 

 


재능의 발견, 끊임없는 열정이 더해져 실력으로 

남들처럼 안정적인 노후를 바라며 반대했음 직도 하지만 그의 아내는 ‘당신은 뭘 하겠다 결심하면 끝까지 하고야 마는 사람’이라며 그의 유학을 응원했다. 흐름이 끊길까 봐 2년간 한 번도 한국에 오지 않을 정도로 의지가 결연했던 것을 보면, 아내의 말은 정확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한 지 불과 몇 달 후 학교에서 주최하는 외국인 대상 그림 공모전에 응모해 입선했다. 노력이 만든 값진 결과이기도 하지만 때론 늦은 나이에 그림을 배우는 그를 보고 의아해하기도, 의구심을 가지기도 한 이들의 편견에 당당히 실력으로 응수한 것이기도 했다. 용기가 났다. 그가 그림과 씨름하는 시간은 더욱 치열해졌고, 실력도 나날이 일취월장했다. 연이어 2006년 중국 임백련배 전국서화예술대회에서 호랑이를 그려 1등상, 중화배 전국서화예술대전에서 금상을 차지하는 등 수상이 이어졌다. 수많은 수상을 하며 승승장구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스스로 늦은 나이에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을까?’ 또 ‘언제까지 배워야 할까’ 싶기도 했다. 교수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교수를 찾아가 내가 예순 살인데 ‘내 나이에 그림을 계속해도 되나’ 물었죠. 교수가 ‘된다’고 단언하더라고요. 중국에 금농이라는 화가는 쉰 살에 붓을 처음 잡아 예순이 넘어 대나무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청나라 최고의 화가가 됐다고 하더군요. 미국 여류 화가인 그랜드마 모세스는 일흔이 넘어 그림을 시작했지만 국민화가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또 2년만 배우면 기본적인 실력은 갖출 수 있지만 그다음에는 당신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달렸다는 말에 스스로 주저할 것 없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큰 동기 부여가 됐어요.”





그렇게 2년의 중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이번에는 일본 유학에 나섰다. 중국, 한국, 일본 3개국의 그림을 섭렵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무엇보다 동양화의 변화를 빠르게 알 수 있는 일본에서 세계 동양화의 흐름을 보고 전통에만 갇힌 작품이 아니라 좀 더 폭이 넓은, 열린 작품을 그리고 싶었다. 마침 일본은 수출입은행 재직 시 4년간 체류했던 경험이 있어 언어나 생활이 낯설지도 않았다. 중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한 지 한 달 만에 다시 짐을 싸 경도조형예술대학으로 향했다. 박물관, 미술관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좋은 그림들을 눈에 담아 배우고자 했다. 중국에서 쌓은 정통 기본기에 일본에서의 안목과 넓은 폭이 더해지며 그의 실력은 더욱 원숙해졌다. 중국에서처럼 공모전 수상도 이어졌다. 소화미술대전 2회 입선에 이어 일본전국묵화수작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중 하나인 외무대신상을 수상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 수상으로 한국 동양화계에 한 획을 그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신사임당 미술 대상에서 특전하는 등 국내 유수의 공모전에서도 수상해 삼국의 권위 있는 공모전을 휩쓸며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했음을 입증했다. 예순에 시작한 동양화이지만 그의 청춘 못지않은 뜨거운 열정은 불과 3년 만에 이런 성취를 가능케 했다. 그는 인생 2막을 그렇게 또 다른 세상의 길로, 스스로의 이정표를 만들어 가며 거침없이 펼쳐 냈다. 

 


섬세함과 생동감을 갖춘 감각적인 동양화 작품 

2009년, 안창수 동문은 첫 전시회를 열고 40여 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 세계는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주로 그렸던 작품들은 동물화, 화조도다. 닭 소재에서 시작해 독수리, 호랑이, 말, 용 그리고 연꽃, 매화 등을 화폭에 담았다. 동물화에서는 그의 특기인 빠르고 힘 있는 필치로, 화조도에서는 섬세한 필치로 소재에 따라 다채로운 화풍이 느껴진다. 한 평론가는 그의 작품을 ‘전통적인 것을 기반으로 무엇보다 감각적인 운필과 표현을 통해 현대성을 표현하고자 한다. 수묵을 근본으로 하되 채색의 운용을 통한 현란한 변화와 대상에 대한 감각적인 표현을 더했다. 흥미로운 것은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필치로 빠르게 대상을 개괄하고 전통 운필법의 무겁고 둔중하며 느린 것에 비해 경쾌하고 날렵하며 속도감을 반영하고 있다’고 평했다. 그의 작품세계를 꿰뚫어 본 평이라고 그 역시 동의한다.


“그림을 배울 때 많이, 빠르게 그리면서 트레이닝을 했어요. 다른 사람보다 세 배는 빠르게 그렸을 거예요. 유학 시절, 한 교수님은 천천히 그리라고 할 정도였죠. 잘 안되더라고요. 중국의 서비용이라는, 말 그림으로 유명한 작가가 있어요. 저 역시 말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렸지만, 그 작가는 그림을 그릴 때 너무 빨리 그려 붓질이 안 보일 정도였죠. 그 말씀을 학장님이 하시며 하고 싶은 대로 그리라고 하셨죠. (웃음) 그런 시간에서 나온 필치가 자연스레 제 작품 세계에 드러나는 것이죠. 사실 빠르게, 많이 그렸던 것이 제가 숙련될 수 있게 한 기반입니다.” 


남들보다 빠르게 그릴 수 있기에 그는 다작을 하는 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한 해에 한두 번은 전시회를 열고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벌써 18번의 전시회를 했다. 또 그의 작업실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작품들이 가득하다. 


수묵채색화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섬세하고 다채로운 색감의 화조도도 감각적인 화풍으로 각광받지만 힘 있고 경쾌한 필치의 동물화에 있어서 그의 명성이 자자하다. 특히 호랑이를 소재로 한 그림은 독보적이다. 화폭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호랑이 그림의 생동감은 감탄을 자아낸다. 호랑이 그림전만 13회 개최했고 2018년에는 국립백두대간 초청으로 ‘호랑이전’을 가지기도 했다. 연세의 상징이기도 한 ‘독수리’를 소재로 한 그림도 그에게 각별하다. 특히 지난 2012년에는 그의 독수리 그림이 연고전에서 대형 현수막 그림으로 잠실 주경기장에 걸렸다.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비상하는 독수리의 기상을 표현한 그림으로 우리 대학교의 응원 열기는 더욱 뜨거웠고 동문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은 순간은 뜻깊은 추억이다. 2019년에는 졸업 50주년 재상봉 기념 책자 표지에 들어간 작품을 기부하기도 했다. 2013년 상대 동창회로부터 ‘자랑스러운 연세인상’을 수상했고, 2018년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동양화가로 ‘한국을 빛낸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을 수상해 연세 동문의 명성을 다시 한번 드높였다. 

 





(작품 사진 제공 : 안창수 화백)




전형성을 벗어나 다양한 영감으로 채워지는 새로움 

동물화와 화조화에 주력하던 안창수 동문은 요즘 새롭게 ‘산수화’에 몰두하고 있다. 산수화에 있어서도 자신만의 세계를 그려 내고 싶다. 


“과거에 갇힌 그림을 그리는 것을 경계합니다. 산수화 하면 흔히 떠오르는 전형적인 그림들이 있잖아요. 노인이 도포 입고 서 있는 모습 같은 것이 떠오르죠. 그런 그림에는 흥미가 안 생겨요. 저는 좀 더 새롭고 세련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그는 하나에 매몰되기보다는 더 다양한 영감을 받길 원한다. 그래서 그가 영감을 받는 작가도 스펙트럼이 넓다. 하지만 여러 작가들의 장점, 그가 자기화하고 싶은 기법들은 그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수없이 따라 그려 봐야 비로소 그의 것이 된다. 그리고 성실한 노력이 더해져 그만의 독보적인 작품이 탄생한다. 




“사실 소재에 따라 닮고 싶은 부분들이 다르죠. 어떤 소재를 그릴 때는 이 작가의 기법을 배우고 싶고, 또 다른 소재를 그릴 때는 저 작가의 기법을 닮고 싶습니다. 때로는 경직된 교육 속에서 한 가지만, 정답만, 남들과 같은 것만 하는 작품들도 있어요. 어찌 보면 작가로서 게으른 것이고 그렇게 밤새워서 그린들 좋은 작품이 나오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다양한 영감 속에서 새로운 시도와 경험으로 바탕을 쌓은 후 하나에 깊이 있게 집중할 때 그 깊이가 더욱 원숙해진다고 봅니다. 저 역시 산수화 그리기를 시작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직 산수화까지 가지는 못했어요. 다방면에서 공부해야 할 것들이 아직 너무 많고 정말 열심히 해야 제대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이순의 나이에 중국으로 떠나며 인생에 새로운 장을 열어갔던 것처럼 그는 정체되고 안주하는 삶보다는 언제나 그의 화폭처럼 생동감 있고 역동적인 삶을 살았다. 늘 새로움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삶의 풍성한 양분으로 쓰는 그의 삶이 고스란히 작품관에 녹아 있는 것이다. 

 


더 깊이 있게, 더 원숙한 작품을 위해 

안창수 동문은 작품을 기부하는 일에도 열심이다. 그의 작품은 시청과 같은 관공서에 걸려 대중들에게 좋은 기운과 함께 한 폭의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다. 때로는 자선 바자에 내놓아 판매 금액을 기부하기도 한다. 소수만이 누리는 공간, 자신의 작업실 한편에서 갇혀 있지 않고 열린 세상에서 공동체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 


그는 올해 전시도 계획하고 있다. 몸담았던 수출입은행에서 지난해부터 제안한 전시 외에도 해인사와도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다. 또 이제는 완급을 조절해 가며 소재를 좁혀 깊이를 더하고 싶다. 


“소재를 좀 줄여서 깊이 있게 가고 싶습니다. 지난해부터 몸이 좀 안 좋아 예전처럼 빠르게 그리는 것이 힘에 부치게 됐어요. 예전에는 빠르게 그리니 한 번 앉으면 한 폭을 끝내고야 말았거든요. 요새는 한 시간 정도 그린 후 쉬었다 다시 그리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데 그림이 훨씬 좋아졌다고들 해요. 차근차근 그리면서 스스로 잘못된 점을 발견하게 되고 그림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어요. 다작을 줄이고 소재와 각 작품에 좀 더 집중해 나가는 방향으로 깊이를 더하고 싶습니다.” 

 


인생의 반전을 가능하게 하는 것, ‘재미있고 잘할 수 있는 일’ 

안창수 동문에게 동양화와 함께한 인생 2막은 삶의 새로운 의미와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가 잘할 수 있는 일, 즐기며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금융인으로 살았던 그가 은퇴 후 무료한 일상에 안주했다면 불가능했던 일. 인생 후반전을 예술가로 살게 될지 그조차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이런 삶의 반전을 누구나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때로는 자신 스스로 무엇이 나의 재능인지, 어떤 일에 재미를 느끼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어떤 직업은 해 보니 재미있고 잘할 수 있다고 깨닫기도 합니다. 가능한 한 빨리 찾는 것이 중요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대단한 일보다는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일에 대해 끊임없이 다양한 경험을 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림을 좋아한다면 화실에도 가보고 전시도 보면서 자꾸 해 봐야 아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탐색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 분야를 찾아 빨리 매진하는 것, 진로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도, 은퇴 후 인생 2막을 설계하는 이들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안창수 동문 스스로도 새로운 즐거움을 가져올 일을 멈추지 않는다. 2007년부터는 광고, 영화에 출연하는 시니어 배우로도 또 다른 변신을 꾀하는 중이다. 일본어 실력을 십분 살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에서 일본 문부대신 역을 맡았고 공익광고에도 출연했다. 배우로서의 새로운 도전은 새로운 활력이 되고 있다. 배우로서의 꿈도 갖게 된 그는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열정을 다할 생각이다.


안창수 화백의 호는 설파(雪坡), 눈의 파도다. 어린 시절 공부하러 들어간 절에서 한겨울 바람과 함께 어우러지는 눈을 보며 자신도 이 눈 파도처럼 어떤 순간의 어려움도 잘 헤쳐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림에 첫발을 내디딜 때 문득 그때의 다짐을 다시 회상하며 호를 떠올렸다. 눈 파도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도전적으로, 안주하지 않고 개척해 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삶, 그리고 그의 작품 세계를 가장 잘 담아내고 있다. 그런 멈춤 없는 시간을 축적하며 그는 인생 2막, 동양화가의 거장으로 그의 삶의 화폭에 아름다운 세계를 펼쳐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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