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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신간 안내] 국가관리연구원, 『김창룡 특무대장 암살사건 해부』 발간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2-11-28

국가관리연구원, 『김창룡 특무대장 암살사건 해부』 발간

이승만 정부 시기 국가 정보 역사를 메워 주는 학술적 가치 지녀



국가관리연구원(원장 이정욱) 소속 정주진 박사는 11월 25일 김창룡 특무대장 암살사건을 분석한 ‘김창룡 특무대장 암살사건 해부’ 제목의 단행본을 출간했다.


이 책은 육군 특무부대가 출범해 성장하는 과정과, 김창룡이 특무부대의 기반을 구축하고 그 책임자의 지위에 올랐다가 갑자기 암살되는 과정을 신뢰성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해설하고 있다. 연구자의 주관적 판단이 아니라 1차 자료를 근거로 제3자적 입장에서 고증해 나간다는 점에서 자칫 영웅론 혹은 자기 미화에 빠지기 쉬운 자서전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육군 특무부대가 이승만 정부 중기(1952-1956) 국가 정보 활동을 주도한 조직이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그동안 한국 현대사의 공백으로 남아있던 이승만 정부 시기 국가 정보의 역사를 메워 주는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육군 특무부대는 현 국군방첩사령부의 전신이다. 정부 수립 시기 육본 정보국 산하 특별조사과로 탄생해 6·25전쟁 초기 특무부대란 독립부대로 탄생(1950.10.21.), 방첩부대, 보안사령부, 기무사령부, 안보지원사령부 등으로 개칭됐다가 현 정부 들어 다시 국군방첩사령부로 그 이름을 바꿨다. 군사보안을 책임지고 있는 조직이다. 오늘날 국정원과 같은 국가 차원의 정보를 종합판단하는 정보 기구가 없었던 시절 정부를 대표하는 정보기관이었다.


김창룡 대장이 한국현대사에 남긴 공적과 과오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그에 대해서는 그동안 비판적 평가가 주류를 이뤄 왔다. 그가 갑자기 암살당함으로써 그 자신은 항변할 기회를 잃었고, 그를 죽인 자들의 주장만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이 책자는 이러한 현실을 감안, 제3자적 입장에서 그의 암살을 초래한 법적ㆍ제도적 요인과 인적 상호 관계를 실증적으로 규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김창룡 육군 특무대장은 1956년 1월 30일 아침 출근길에 피살됐다. 그해 5월 15일로 예정된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국이 팽팽하게 긴장되던 시점이었다. 1년여간의 수사와 재판 결과, 암살의 배후에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이 개입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암살은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의 군부 리더십에 대한 문제점이 응축돼 폭발한 정치군사적 의미가 함축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 통제에 큰 상처를 입은 이승만 대통령은 군부 통제 방법을 전환하게 된다.


6·25전쟁을 겪으며 한국의 군부는 한국 사회 최대의 압력집단으로 부상하게 된다. 그리고 전후 독립한 해외 신생국들에서 군부 쿠데타가 빈발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면에서 이승만은 군 내부에 3대 파벌을 조성해서 군벌 간 견제와 균형을 통해 군을 통제했다. 정일권파(함경도 출신), 백선엽파(평안도 출신), 이형근파(이남 출신)가 이승만이 의도적으로 조성한 3대 파벌이었다.

 

대통령의 입장에서 군벌 간 견제와 균형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군 내부의 실상과 움직임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그러한 정보를 이승만은 특무대와 헌병총사령부를 통해 수집했다. 그리고 특무대와 헌병총사령부도 서로 견제하면서 대통령에 대한 충성 경쟁을 벌이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대통령은 군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김창룡 특무대장의 암살은 이러한 시스템의 파괴였다. 특무대와 정일권파의 충돌로 시스템이 마비되자 이승만은 정일권과 이형근을 예편시키는 방식으로 군벌을 해체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군부에 대한 통제력이 떨어져 박정희,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군벌이 형성되고 5·16정변이라는 정치변혁으로까지 나아갔다.

 

vol. 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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