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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시네마, 필름, 무비] 부디 잘 지내기를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4-05-27

부디 잘 지내기를

<윤희에게> (2019)

작곡과 임지선 교수




세상의 모든 딸들은 어느 순간 엄마의 첫사랑이 궁금해지지 않을까요. 영화 <윤희에게> 속 윤희의 고등학생 딸 새봄은 더 그랬을 것 같아요. 엄마와 아빠가 헤어질 당시 엄마의 외로움을 미리 본 새봄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엄마를 따라가기로 했으니 말입니다. 부모의 이혼으로 새봄이 겪어야 했던 상실감과 주변의 불편한 시선은 이 영화에 자주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봄은 직장과 집을 오가는 엄마의 지친 표정에서 어릴 적 자신이 내린 결정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엄마를 위로하며 지키겠다는 어릴 적 결정이 터무니없고 자신이 오히려 엄마의 짐이 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엄마에게 미안하고 슬픔 감정까지 느끼게 됩니다. 특히 엄마와 헤어진 후 여자친구가 생긴 아빠를 만나고 온 날이면 그 감정이 더욱 더 깊어지곤 했어요. 그래서일까요? 퇴근 후 거실에서 담배 한 모금에 잠시 평화를 얻는 엄마를 이해하려 애쓰고, 나중에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고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영화 <윤희에게>




엄마 윤희의 날들은 어떻게 채워지고 있을까요. 유일한 식구 새봄과 살기 위해 직장에 다니는 윤희의 삶은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아 보입니다. 불행하지 않아 행복한 것이고 행복하지 않아 불행한 걸까요. 윤희가 새봄을 보며 가끔 미소 짓거나 잔소리하는 걸 보면 주변의 다른 엄마들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새봄이 가지고 있던 라이터를 압수하며 유난을 떨지 않는 엄마의 모습은 조금 다르게 보이죠. 엄마가 흡연하는 모습을 본 새봄의 반응도 조금 다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윤희와 새봄이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이었을 거예요. 알면서도 모른 척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속으로만 ‘그럴 수 있어, 별거 아니야’하고 되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윤희와 새봄의 일상은 특별한 일 없이 함께, 또 따로 흘러갑니다. 평화와 무료함 사이에 공간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윤희와 새봄이 제자리걸음하듯 하루를 보내는 곳일 것 같아요.






그러던 어느 날 익숙해진 리듬을 깨는 편지 한 통이 옵니다. ‘윤희에게, 잘 지내니?’ 일본 오타루에서 쥰이 윤희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윤희 몰래 편지를 읽은 새봄은 오타루 여행을 제안하고 윤희는 순식간에 20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좋았던 기억 그리고 가슴을 에는 통증에 고통스러웠던 기억보다 쥰이 아직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는 설렘으로 윤희는 새봄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죠. 윤희와 새봄은 눈이 허리까지 쌓인 오타루로 겨울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추운 겨울 날씨보다 더 시린 윤희의 마음과 호기심 가득한 새봄의 마음은 두터운 겨울 외투 속에 꼭꼭 숨긴 채. 윤희의 전남편 용호의 말대로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윤희가 더 큰 외로움의 근원 오타루로 갑니다.


윤희의 옛 연인 쥰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았을까요. 윤희가 가진 외로움과 슬픔의 근원, 오타루의 쥰이 여성임이 밝혀지고 그로 인하여 윤희와 쥰이 겪은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드러납니다. 부모의 이혼 후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온 쥰은 고모와 함께 살면서 독신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윤희를 향한 그리움이 짙어지고 ‘윤희에게, 잘 지내니?’ 하고 편지를 쓰지만 차마 보내지 못하고 있었죠. 다시 꺼내기 두려울 정도로 깊은 상처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추억은 맑은 시냇물 속 조약돌과 같아서 꺼내지 않고 바라볼 때 가장 빛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영화 <윤희에게>




윤희와 쥰 두 사람의 상상도 못한 만남이 그들을 사랑하는 숨은 조력자들 덕분에 이루어집니다. 윤희의 딸 새봄, 새봄의 친구 경수 그리고 쥰의 고모 마사코입니다. 마사코가 쥰의 편지를 부치고, 새봄이 그 편지를 읽고, 경수는 새봄이 깜찍한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의논 상대가 되어주죠. 심지어 윤희 몰래 오타루까지 따라갑니다. 윤희가 모르게? 그건 새봄과 경수의 착각일 뿐 윤희는 늘 그렇듯 모르는 척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오타루의 한겨울 혹한은 윤희의 시린 가슴보다 훨씬 더 차가울지 모르지만 영화 속 장면은 그렇지 않습니다. 좁은 다다미방에서 새봄과 경수가 뒤집어쓴 이불과 작은 전기난로, 운하의 불빛과 마사코의 집 의자 위에 앉아있는 고양이에게서 온기가 느껴집니다. 무엇보다 눈 덮인 오타루 거리에서 낡은 카메라를 들고 웃는 윤희의 환한 모습이 따스해 보여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어요.


윤희와 쥰은 만나게 되었을까요. 만났다면 그들이 나눈 첫마디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그 만남 이후, 무채색이던 그들 삶의 빛깔이 달라졌을까요. 네, 만났습니다. 그들의 첫 대화는 쥰의 ‘윤희니?’였어요. 그날 이후 그들의 삶의 방향이 달라졌는지에 관한 궁금증은 영화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영화이든 소설이든 인생이든 반드시 결론에 도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사실 이 영화는 다소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어떤 사람은 조금 불편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엄마의 첫사랑에 대한 호기심은 별로 특별하지 않지만 그 상대가 일본인 여성이라는 사실마저 특별하지 않다고 할 수 없죠.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다름’을 다르지 않게 보고 ‘특별함’을 특별하지 않게 보는 감독의 시각이었어요. 노년의 마사코부터 고등학생 새봄과 경수에 이르기까지 저마다의 아픔과 고민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고통의 원인을 찾아내려 애쓰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영화 속 등장인물 중 자신의 아픔을 그대로 내보이며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진심 어린 사과와 위로를 애원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말이죠. 그래서 그런 걸까요. 인물들의 사연을 구구절절하게 드러내지 않는 영화가 폭설에 파묻힌 오타루의 풍경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시나리오를 먼저 읽게 된 저는 영화가 개봉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영화는 저의 상상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아름다운 장면으로 채워져 윤희의 가버린 날, 오늘, 그리고 앞으로 올 날들을 담백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엄마와 딸의 심리를 이토록 섬세하게 그려낸, 한 번도 딸이었을 수 없는 임대형 감독의 감성의 폭에 대한 궁금증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개봉일: 2019년 11월 14일 (대한민국)

감독: 임대형

수상: 청룡영화상 감독상, 청룡영화상 각본상

배급사: 리틀빅픽쳐스

제작사: 영화사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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